내 일기장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사랑이 전해지기를

by lalageulp

'엄마의 일기장'이라며 때때묵은 엄마가 쓴 그 옛날 일기장이 SNS에서 화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일기장 속에 담긴 엄마의 진심과 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다웠기에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엄마가 자식들이 보내고 있는 시절과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걸 가끔 잊는 듯합니다.

그때의 엄마들도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군분투하며 육아를 했을 것이고, 치열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더 나은 미래를 꿈꿔왔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그러하듯이 말이죠.

아마도 '엄마의 일기장'은 그 시절의 엄마를 발견할 수 있는 고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역시 그 옛날 때때묵은 엄마의 일기장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 속의 엄마는 가계부를 쓰는 모습은 있지만 일기를 쓰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그마저 쓰던 가계부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잘 안 쓰게 되었다고 하시니 일기장을 대신할 '엄마의 글'을 통해 그 시절의 엄마를 만나보고 싶어 졌습니다.

머리를 짜내어 엄마가 쓴 글들이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어릴 적 아빠와 부부싸움을 하고 난 뒤 적은 '각서(?)'들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났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각서'의 효력은 증명할 수 없지만 부부싸움의 종착점임을 새삼 느낍니다)

그리고 수능날과 어쩌다 한 번씩 써주신 생일날의 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 편지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더라고요. 분명 잘 보관한다고 넣어두었는데 몇 번의 이사와 짐정리 하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합니다. 그런데 그 글 속의 엄마의 감정이 아직도 제 안에 남아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글에는 항상 미안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고마움도 있었지만 늘 미안함이 가장 컸습니다.

각자의 집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아마도 잦은 부부싸움과 두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큰 딸로서의 역할이 엄마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엄마의 육아는 항상 미안한 감정과 함께였던 거 같습니다.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할머니가 되고 나서는 어쩐지 모르게 엄마가 나에게 더 잘해주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엄마도 자식을 키워왔던 입장이다 보니 그걸 이해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그게 다 미안한 감정에서 오는 거라는 걸 이 글을 쓰다 보니 왠지 알 거 같습니다.




결혼과 육아를 시작한 지 10년 차 저에게는 3권의 일기장이 생겼습니다.

일기를 써보겠다고 노트를 펼쳐도 늘 3일을 넘기기 어려운 사람인지라 초등학교 이후로 이렇게 일기를 다시 쓰게 될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그런 제가 무려 3권의 일기장을 썼다는 것은 스스로 놀라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저에게도 아이에게 보여줄 일기장이 생겼습니다.


저의 첫 번째 일기장의 첫 페이지에서는 러브레터를 쓰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무렵, 이 벅찬 마음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겁니다.

일기장 속에는 아이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사랑에 빠진 저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부터는 아이의 작은 손짓 발짓 하나에도 감동해서 글로 모두 적어 두었는데요. 제가 쓴 글이지만 글 속에 얼마나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하루를 멀다 하고 초딩딸과 싸우며 속이 터진다며 미간을 찌푸리는 지금과는 너무나 상반된 모습 있었습니다.

문득 싸울 때마다 "엄마는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라고 사랑을 의심하는 아이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엄마가 자식을 싫어하고 미워할 수 있을까요? 단지 더 잘되라고 하는 잔소리가 아직은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충분하지 않을 뿐인 거겠죠.

그래서 아이에게 제 일기장을 내밀었습니다. 엄마의 진심이, 엄마의 사랑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세 번째 노트는 모두 '데스노트' 수준이라는 것!

앞선 글에서도 한 번 언급했듯이 검은 오로라가 피어오르는 두 권의 일기장에는 후회와 절망, 미움과 비난이 가득하여 읽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글이라는 것이 신기하게도 감정이 다 드러납니다.

내가 엄마의 글 속에서 미안함을 느꼈듯이 그때 내가 가진 부정적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좋은 일에도, 슬픈 일에도 욕을 쓴 건 아니지만 비뚤어진 마음이 그대로 묻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만요. 그럼에도 아이가 커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아이에게 이 일기장을 보여주기에는 조금 창피한 마음이 듭니다.

언젠가는 엄마의 흑화 된 시절을 일기장을 통해 아는 날이 있을 테지만요.


어릴 적 왜 그렇게 다들 일기를 쓰라고 했는지 이제는 알 거 같습니다. 일기장은 그 시절의 누군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타임머신이기도 하지만, 감정을 솔직하게 꺼내 놓고 마음을 내려놓는 연습을 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오늘의 감정을 그대로 두면 정리되지 않은 마음은 쌓이고, 다시 기억하고 싶은 마음은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순간순간의 감정들이 흘러가 버리지 않도록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 틈틈이 일기장을 펼칩니다. 그 안에는 아이를 향한 사랑도, 서툴지만 분명한 우리의 행복도 남아 있고, 추슬러진 기록 위에 오늘의 나는 조금 더 다정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가 삶이 버겁다고 느끼는 날이 오면, 누구에게나 그런 힘듦의 시간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너를 사랑하며 이 시간을 건너왔다는 마음을 일기장을 통해 전해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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