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기내식 먹으러 와~” 말귀를 금세 알아차린 남편이 큭큭 웃으며 식탁에 앉는다.
“국산 생 주꾸미와 멍게, 막걸리까지 주는 항공사 봤어?” 기내무료 제공 와인까지 세팅완료하고 건배!. 시계를 보니 우리가 비행기를 탔다면 딱 기내 석식을 먹을 시간이다. 이 말인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건배를 한 이유가 이 글을 쓰게 된 단초다. 시작은 두어 달 전, 우리 부부의 이집트, 요르단 패키지 예약이다. 얼리버드라 한동안 잊어버리고 지내다 출국날이 다가오면 짐을 싸기 시작한다. 짐 싸기는 그 나라의 기후, 환경, 체류일정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 사람의 성격과 취향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같은 곳이라도 배낭 하나를 메고 갈 수도, 대형캐리어를 끌고 갈 수도 있다. 내 짐 싸기 스타일은 며칠 전부터 캐리어를 펼쳐놓고 생각나는 대로 던져 넣다가 전날 밤 각 맞춰 제 자리 잡기, 대문자 J형인 내게 짐 싸기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고된 작업(?)이다. 예전에 쓴 ‘여행은 공항에서 시작된다’라는 글이 무색하게 이제 ‘여행은 짐 싸기에서 시작된다’로 다시 써야 할 것 같다. 이번 경우처럼 남편과 같이 갈 때는 챙길 게 배가 된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서 역할이 바뀌어 내가 남편의 매니저가 된 것, 남편만 졸졸 따라다니던 내가 언제부턴가 앞장서고, 남편은 뒷짐 지고 지시하고, 결국 대내적, 대외적 모두 내 몫이 되었다. 어쨌든 출국 전날,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캐리어 세팅을 마치고 내일 여행을 위한 건배를 하고 있는데.. 뉴스에서 ‘미국 이란 침공’ 속보가 떴다. 불안한 마음으로 예의 주시, 결국 ‘중동 영공 폐쇄’ 자막이 뜨면서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여행사에서 여행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예상한 일이라 아쉬움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나마 오후 비행기라서 공항에 가지 않아도 된 것, 오전 출발팀은 일단 새벽에 공항에 가야 했을 것이고 만약 어제 출발했으면 공항에서 기약 없이 발이 묶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터미널’ 영화가 생각나고 알랭드 보통의 책 ‘공항에서 일주일’도 떠오르고, 나는 책 보고 그림 그리고 심심하진 않을 텐데, 이 생각이 철없는 초딩수준이었음이 판명된 것은 며칠 후, tv속 아부다비 공항은 피난민 대피소를 방불케 했다. 무시무시한 미사일 폭격을 보고 들으며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 그 속에 내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림? 독서? 내 성격상 기절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남편은 오후 출발이 운이 좋았다며 위안을 삼자 하고. 나는 짐 싸느라 고생한 며칠이 아깝긴 하지만 11일간의 일상을 되찾은 것을 위안으로 삼고, 역대급 동상이몽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 기내식 코스프레를 했으니 건배가 빠질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보다 내 안위가 우선?)
일단 ‘잘 다녀오세요~’ 인사를 했던 아들들, 동생들, 그림친구들에게 여행이 취소됐다는 문자를 보냈다. 운이 좋았다는 답은 같은데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다. 불교신자는 부처님이 돌보셨다 하고, 천주교 신자는 성모님 은총, 그도 저도 아닌 무교는 조상님이 돌봐 주셨다한다. 일 년 치 복을 한꺼번에 받은 느낌이다. (올 한 해 겸손하게 살아야겠다 급 숙연).
이 사안을 쳇지피티에게 한마디로 요약해 달라고 했더니 '위험회피'라 한다. (역시 아직은 장난감 수준?) 나에게 물어본다면 ‘인간지사 새옹지마’. 이집트 요르단 여행기 대신 여행 취소 후기를 쓰게 될 몰랐으니까. 전쟁이 났는데 건배를 하게 될 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