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사람, 자연..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이 좋아하는 소재가 있다.
그림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여러 소재로 다양하게 시도하지만 어느 정도 그리다 보면 좋아하는 소재가 생기고 그 소재에 집중하게 된다.
내 경우 또한 무언가를 열심히 그렸는데 그리고 보니 그 무언가는 거의가 집이었다.
예전에 눈만 돌려도 볼 수 있던 집들은 이제 아파트에 가려 찾기 힘들어졌지만, 내 기억 속의
집들은 미처 다 하지 못한 숙제처럼 내 그림 속을 드나들었다.
집은 어떤 의미로 내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왔을까.
기쁘고 행복했던 집, 때로는 슬픈 여행처럼 아픈 집.
집은 그 시절 나의 생각과 느낌을 담고 있는, 저마다 다른 색깔과 모양의 그릇과 같다.
장소는 시간과 맞물려 고유해지며, 보일 듯, 들릴 듯, 손에 잡힐 듯, 코끝에 느껴지는 냄새까지 개별적이다. 시간의 관점이 아닌 공간의 관점에서, 집은 오감으로 체득된다.
그 이야기들은 앙금처럼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가, 무언가로 인해 헤집어지는 순간 수면 위로 떠 오른다.
더 이상 묵힐 수 없는, 한 번은 털고 가야 하는, 자정()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집은 기억이 뒤섞이는 유년시절을 제외하고 연대기 순으로, 여러 형태와 느낌으로 남아 있다.
어스름 저녁 햇살 무렵,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일나 간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의 한 칸짜리 조그만 집,
햇살을 반찬삼아, 한 솥 가득, 둘러앉아 국수 텔레기를 먹던 대청마루가 있던 청소년기의 집,
혼자 누우면 꽉 차던 학교옆 서울의 자취방,
반지하, 연탄보일러로 시작한 신혼시절 전세방,
욕조가 있는 화장실에 열광했던 가슴 벅찬 생애 첫 분양 아파트,
갑자기 쓰러진 아들 소식에 날아간 런던, 지옥 같고 감옥 같았던 몇 개월간의 런던의 아들방. 그 후 여러 집을 거치며 집은 점점 부피를 늘려갔지만 여전히 집을 찾아 헤매고 집을 그리면서 알 수 없는 갈증을 풀어야 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꿈꾸었던 이층 집의 로망.
내가 사는 곳 주변의 연남동, 연희동에는 예전의 이층 목조 양옥집을
골조와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내부 인테리어만 변경한 식당이나 카페가 많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부산은 따뜻한 지방의 기후특성상 대부분의 집이 마루가 높고 오픈되어있는
일자형 주택이나 적산가옥으로 이층 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첫 이층 집은 서울 홍은동 이모집, 방학 때 엄마는 가끔 나를 데리고
서울 나들이를 하셨고 이모집은 어린 내게 그림책에서 보던 궁전처럼 으리으리하고
멋있어 보였다.
철커덕하고 열리던 철대문, 마당과 정원을 지나 대여섯 개의 계단을 올라 현관을 들어서면
거실, 화장실, 부엌, 안방, 그리고 동갑내기 사촌 방이 있었고 이 카페와 같은 나무계단을 오르면
이모의 시부모님 방, 남자 사촌들 방, 베란다가 있었다.
외동딸에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무엇보다 나긋나긋한 서울 말씨로 나를 주눅 들게 했던
동갑내기 사촌. 그 부드러운 서울 말씨가 그땐 왜 그리 차갑게 느껴지던지,
사투리를 쓰는 내겐 외국어처럼 버거웠다.
이제 보고 싶은 이모는 세상에 안 계시고 공주 같기만 하던 사촌도 세파에 시달리는 아줌마가 되었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이방, 저 방, 계단참, 여기저기에서 오버랩되는 이모집과 어린 시절의 내 모습.
데자뷔..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에 있은듯한.
꿈꾸기 좋은 계절, 긴 꿈을 꾸고 있다.
작은 방, 오래된 가구, 안과 밖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문들.
그림 속의 집은 자그마하지만 생각은 그 속에서 확장되고 날개를 단다.
어린 시절 소꿉놀이를 하듯 가구들이 옮겨 다니고, 다양한 카펫이 놓여지고,
페치카를 보며 겨울을 그리워하고, 창으로 드나드는 햇살로 여름을 추억한다.
생각만 해도 행복한.. 내가 찾은 정답은 ‘생각만’이다.
생각 속에 있을 때에는 애틋하고 달콤한 그 무엇이 소유의 순간
더 이상 애틋하지도 그립지도 않게 된다. 때때로 버거워지기도 한다.
이럴 때 그려야 한다. 그림 속에서 소유는 기꺼이 감수하고 싶은 버거움.
변명이어도 괘변 이어도 상관없는 행복한 소유가 된다.
삼한사미로 칩거가 일상이 되어버린 겨울, 감염병으로 감금, 격리되어야 하는
이번 겨울은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는 겨울 보너스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