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이야기.

by 한정선



바다 하면 떠오르는 것은? 부서지는 하얀 파도, 백사장, 수평선, 갈매기, 갯바위 그리고 등대.

등대하면 떠오르는 것은? 외로움, 의연함, 지표.

느닷없는 퀴즈는 '등대'라는 조금 무거운 소재를 가볍게 풀어가고자 함이다.

사실 등대를 처음 본 순간, 특이한 건축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뿐 그 의미를 염두에 두고 그린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처럼, 그리다보면 새롭게 다가오고,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궁금해진다.

이런저런 접근방식과 상관없이 내게 등대는 ‘등대지기’라는 노래로 먼저 다가온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우리 세대라면 한 소절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노래,

같은 노래를 자꾸 부르다 보면 경험하지 못한 노래 속 세상을 마치 보고 겪은듯한 착각에 빠진다. 노래를 부르면, 내가 마치 한겨울의 아름다운 바다를 지키는 등대지기가 된 듯 쓸쓸하고 외로워지고, 그 의미심장한 가사로 비장해지기도 했다.

아는 노래가 별로 많지 않던 그 시절, 오락 시간에 부를 레퍼토리 속에 꼭 들어있었던, 그 노래를 부르다 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등대의 존재와 의미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수십 년 세파에 잊어버리고 산 등대, 어반 스케치를 하면서 다시 만났고, 노래 속 등대는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




노래 속이나 그림 속에서 등대는 넓고 넓은 바다 한가운데, 찾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조그마하게 표시되곤 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면서 실제로 본 등대는 작지도 않았고, 바다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등대를 보러 간 것은 아니었는데 섬 트레킹 중 느닷없이 눈앞을 가로막던 여수 오동도의 등대와 언덕 위에서 마을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던 묵호등대는 마을 한복판에서 늠름하게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밤바다를 지키는 본래의 임무 외에, 낮의 등대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보였다.

알고 보니 내가 다닌 거의 모든 바다에 등대가 있었다. 속초, 여수, 부산.. 관심이 없어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한창 ‘다리’에 빠져 있던 때, 내가 그렸던 다리 옆에 등대가 있었음을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이제 바다의 목록에 등대가 추가되었다.

스카이워크도, 해상 케이블카도 생소하기만 한 내게 등대는 바다를 여행할 또 다른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어린 왕자가 자기 별에 있는 장미 꽂을 생각할 때 하늘만 봐도 아늑해지는 것처럼, 등대를 생각하면 한겨울에도 바다가 보고 싶을 것 같다.



등대를 그리면서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 나오는 죽변등대가 생각났다.

‘배들은 등대의 섬광을 보고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다.

상대의 위치를 알아야 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 혼자서는 나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외지고 높은 곳에서 모르소 부호 같은 섬광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대는

개별적인 깜박임의 방식으로 각자의 위치를 전달한다.

나는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할 수 없고 나를 둘러싼 주변에 의해서 인식된다.

그러므로 등대는 '지표'인 동시에 '인식'의 메타포다.

내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인스타, 브런치. 모든 SNS가 등대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여기는 000. 나 여기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