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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Dec 28. 2021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코로나와 상관없는 이야기-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겨울, 연말연시까지 겹쳐서인지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딱히 찾을 사람도, 애타게 보고 싶은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따스한 송년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주변은 썰렁한 바람만 지나갈 뿐이다.

이 증상은 당연히 코로나 시국으로 대부분의 모임이 취소된 올해에 생긴 것은 아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오히려 코로나는 주변의 황량함을 가려주는 유용한 도구가 되어 준다. 실제로 불과 이 년 전만 해도 송년회로 분주한 사람들을 보면 괜스레 주눅이 들곤 했는데 작년, 올해는 ‘이 시국에 무슨’ 이 한마디가 갑옷이 되어 주었다. 모임은 많지만  자제 중이라는, 사실과는 다른 뉘앙스를 슬며시 흘리면서. 한마디게임 오버.

물론 코로나 예찬을 하는 것은 아니고, 내 주변이 삭막한 것이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서서히 진행되어가던 사막화는 올해, 그나마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만남마저 접어야 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엎친데 덮친 격, 마치 쓰나미가 지나간 것처럼 황폐해졌다.

바람 부는 벌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증상이 생겼고 연말이 다가오면서 증상은 더 심해졌다. 나만 그런 걸까? 궁금하던 차, 지인에게 지나치는 농담처럼 운을 떼니 기다렸다는 듯 ‘자기도 그래?’ (한때 나도 비 오는 날 먼지 날리게 다니던 사람이었음을 증명해 주는 멘트) 하물며 아이디가 ‘오지랖’이었던 친구조차 ‘나도 그래.’

이 한마디에 진한 동료의식과 함께 위로를 받는다. ‘내가 잘못 살아서만은 아니구나’ 나이가 들면서 머리숱이 줄어드는 것처럼 주변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도 노화의 한 과정이구나, 하는 서글픈 안도감과 함께.

     

원래 나는 코로나로 타의적 격리자가 되기 전부터 사회적 거리두기에 익숙한 자발적 격리자였다.

나무로 텐트를  친듯한 울창한 숲 속보다 비, 바람, 햇살이 드나드는 오솔길이 좋았고,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한 바다보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정다웠다. 텅 빈 휴가철의 도심(사람들 뿐 아니라 차도 떠난 거리), 더위조차 소강상태인 장마철 (장마철이라고 내내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다), 한여름 (해 질 녘), 한겨울(햇살 좋은 날)등, 틈새시장 공략으로 한적한 도심을 즐겼다.

‘넌 원래 번잡한 것 좋아하지 않잖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반격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

너무 많은 것과 아예 없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나의 지론은 코로나 시국과 노화가 겹치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만약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본다면 과연 재미있을까?

유령도시에서 혼자 어슬렁거려야 한다면? 차라리 지옥철이나 만원 버스가 나을 것 같다.

      

예전의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꼭꼭 숨어버렸을까?

아니면 내가 숨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후배와 차를 마시면서 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학창 시절 죽고 못살던 친구들, 유치원도 귀했던 시절, 아이 둘을 업고 걸리고 매일 이집저집 돌아가며 눈도장을 찍던 동네 아줌마들, 아이들을 핑계로 정작 아이들보다 더 친했던 학부모들, 같은 작업실에서 먹고 놀고 그리며 일상을 함께했던 화우들, 여기저기 걸쳐놓았던 단체와 동호회 회원들,  많은 사람들 중 꼭 다시 만나고 싶은 몇 명 있다고. 요즘은 인터넷 사이트에 친구 찾기, 사람찿기앱도 많다는데..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애매하게 주절거리는 내 말에

‘만나서 뭐하게요?’ 후배의 일갈에 추억 속을 헤매던 내 눈빛은 화들짝 현실로 돌아왔다. ‘언니 말대로 그건 시절 인연인가 봐요’

촌철살인. 그래.. 나는 그 말로 내상황을 합리화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말보다 쉬운 게 없으니까. 쿨한 척하면서 마음으로는 지난 인연에 급급한 내가 후배 눈에는 딱하게 보였나 보다.

하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우리의 인연은 그 시절과 함께 지나가버린 것을.

몇십 년의 각자 다른 시, 공간의 간극을 보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메꿀 수 있을까.

     

꼭 붙잡아두고 싶은 시절이 있는 것처럼 꼭 붙잡아두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을 붙잡고 싶은 것은 그 시절을 붙잡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그 시절을 잠시나마 대체해주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자유로운 생각과 달리 냉정한 현실.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면 그때의 애틋함을 느낄 수 있을까?

애틋함은 서글픔으로 변질되고 첫사랑은 씁쓸한 기억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속의 사람은 그 시절 속에 있을 때 그립고 아름답다.

그러고 보니 예전의 그 많던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사진 속에서, 그림 속에서, 내 마음속에서 그 시절의 나와 함께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새록새록 지나간 사람들이 생각나고, 자꾸 두리번거리는 것은 연말연시라는 특수, 보내고 또 맞아야 하는  이중의  통과의례 때문일 것이다.

실뜨기 놀이처럼 엇갈리는 이별만남, 그 느낌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피부로 와닿는다.

그럼에도 새해는 새로운 다짐이 제격.

지나간 인연에 연연하지 말고, 노화 타령도 접어두고, 황폐해진 땅에 다시 나무를 심으리라.

한그루 두 그루 무성해진 나무에 ‘시절 인연’의 꽃이 피고 지고.. 자발적 격리가 그리운 날이 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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