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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May 30. 2023

‘경의선 숲길’에 당첨되셨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에게 주어진 행운보다 불운에 집착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언제나 내 곁에 있으리라 생각되는 행운과 달리 눈앞의 문젯거리는 당장 해결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쓸고 닦아도 쌓이는 먼지처럼 해결과 동시에 생기는 새로운 문제들은 우리의 일상을 잠식한다.

사실 ‘문제’도 나름의 자생력을 가지고 있다. 가끔 지쳐서 던져 놓으면 스스로 해결되기도, 소멸되기도 하고 시간의 힘은 문제를 더 이상 문제시 되지 않게 하는 마술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된다. 아 이게 있었지. (마치 아무리 찿아도 보이지 않던 물건이 어느날 엉뚱한 곳에서 튀어 나올때, 아 이게 여기 있었네, 하는 것처럼.) 그리고는 너무나 당연시되어 잊어버리고 있던 내가 가지고 있는 행운들을 꺼내본다. 그 중 최애 카드는 경의선 숲길, 이토록 멋진 정원이 내 바운더리에 있다는 웬만한 복권 당첨보다 더 한 행운, 문젯거리는 잠시 내려놓고 그림도구를 챙겨 경의선 숲길로 간다. 현실도피, 자기 치유, 뭐가 됐든 소낙비는 일단 피하고 볼 일이다. 비가 개인 후, 세상은 더 빛날지도 모를 일이니까.  

    


서울로 이사 온 지 8년 차, 걸어가나 타고 가나 30분 내에 신촌, 홍대를 갈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지만 번잡한 곳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딱히 호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반 스케치를 다시 시작하면서 연남, 홍대, 신촌으로 연결되는 경의선숲길은 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길게 뻗은 숲길을 따라 산책도 하고 마음 내키는 곳에 앉아 그림 한 장 그리다 보면 스케치여행이 별 건가 싶어진다. 숲길 양방향으로 늘어선 특이한 건물과 자연, 그 속에 어우러지는 사람들, 4월의 벚꽃, 오월의 장미, 신록의 유월과 검푸른 초록, 다양한 초록의 향연이 끝난 뒤 단풍잔치가 열리고 발밑에 수북이 잎이 쌓이면 처연하고 아름다운 빈가지의 계절, 매달 바뀌는 풍경 속에서 숲길은 사계절이 아닌 열두 계절을 변주한다. 접근성이 좋아 벙개도 자주 열리다 보니 스케쳐스들이 마치 내 정원(?)에 놀러 온 손님 같기도 하다. (내가 가꾼 것은 아니나 즐겁게 놀다 가세요~).

혼자도, 여럿이도 재미있는 경의선 숲길은 나의 도피처이자 놀이터, 내가 꺼낼수 행운의 카드중 하나다.

  

 3일 연휴 내내 내리는 비. 지인의 전시를 보러 경의선 갤러리를 갔다. 비 내리는 경의선 숲길은 처음, 비는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만든다. 평상시처럼 보송할 줄 알았던 산책로는 질퍽거리고(물 빠짐이 좋으리라 생각했는데) 비 때문에 한적하겠지 하는 생각은 겹쳐지는 우산의 물결로 넘실거렸다. 그 와중에 비옷 입고 산책 나온 강쥐들.. 며칠 전 선남선녀의 배경이 되어 주었던 오월의 여왕 장미는 비에 흠뻑 젖은 모습에 자존심이 구겨진 듯 축 쳐져있었다.

비 오는 날 수채화(물감이 마르지 않는)는 비 오는 날 생맥주처럼 내키지 않아 색연필을 챙겼으나 수채색연필은 들이치는 비로 번져 흘러내리고 낮술 한잔 하기로 한 ‘오비베어’는 비로인해 취소, 그림 속에서 '그림의 술'이 되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도 있는 거지. 축축한 분위기는 먼저 몸을 통과하고 늦게까지 마음에 남았다. 비로 시작해서 비로 끝난 경의선 숲길 여행,  숲길에도 비가 오고 눈도 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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