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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선 Jun 11. 2023

경주어반스케치 페스타, 두 번째 참가의 비밀.

“그림’은 ‘관계’에 양보하세요~.”




오랫동안 적조했던 경주도 여행하고 멍석도 깔아준다니 그림도 그리고, 작년 경주 어반페스타참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워크샵(강의) 신청은 원래 안 하는지라 신청 시에만 주어지는 D&D(drinking amd draw)도 없으니 낮에는 혼자 마을과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저녁이면 일행과 만나 밥 먹고 산책하고, 한량 코스프레에 지칠 때쯤 ‘따로 또 같이’의 카드를 꺼내는, 힐링에 필요충분조건이 있다면 딱 이런 것이려니 했다.


하지만 올해, 내 책이 부스에 전시되면서 양상이 180도 달라졌다.

갑자기 받은 작가 타이틀에 D&D와 굿즈는 물론. 밥도 주고, 책도 팔아주는 특전(?)이 주어지니 경주에 뭐 하나 해준 것 없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황송할 따름이었다. 늦둥이(책)를 남한테 맡겨놓은 격이니 미안하기도 하고, 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중간중간 들여다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은, 그리하여 이틀 내내 (어쩔 수 없이?) 당연히!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었으니 작년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작년에도 수백 명에 달하는 참가자가 보이지 않았을 리 만무하나 관심밖이었다는..) ‘사람’이란 말속에는 필연적으로 ‘관계’를 내포하고 있으니 결국 작년에는 ‘관계’는 빼고 ‘그림’만 보고 온 것이다. ‘그림’과 ‘관계’, 무엇이 우선인지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10여 년간 수채화를 하면서 겪은 무수한 ‘관계’로 지친 나는 어반을 시작하면서 조용히 그림만 그리리라 생각했다. 아니, 조용히 그림만 그리고 싶어서 어반을 시작했다는 말이 사실에 더 가깝다. 어차피 그림에서 손을 뗄 수는 없으니 여타의 구속이나 남과의 비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어반은 딱 내 스타일로 보였고 한동안, 아니 오랫동안 씩씩한 ‘독립군’ 행보를 즐겼다. 하지만 디에나 있는 유효기간(?), 인친들과의 교류가 늘면서 하나, 둘 모임이 생기고 급기야 전국적 행사인 어반페스타까지 참가하게 되었으니 처음의 각오는 역시 매번 되풀이되는 ‘섣부른 예단’.

     


알고 보면 어반은 가장 많은 관계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어반의 강령 중의 하나가 현장그림이다 보니 모임과 만남은 기본값, 거꾸로 사람들과의 만남이 좋아서 그림을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그림과 관계’, 우선순위는 제각각 다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답은 비중, 가변적이고 생사가 분명한 ‘관계’보다 지속가능성으로 남아있을 '그림'에 더 비중을 둔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관계는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되고 그림이 빠진 관계는 허무할 뿐이라는 생각, 이 생각은 언제나 유용하지만 가끔 빗나갈 때도 있다. 이번 경주어반스케치 페스타가 그 실예, 일탈의 선물은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면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이 등장한 구호, “그림’은 ‘관계’에 양보하세요.”


원래 ‘첫 번째’는 놓치는 것이 많다. 첫사랑, 첫 만남, 첫인상, 새롭고 신선하지만 지나고 나면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살짝 아쉬움이 남는 ’첫‘이라는 접두사.

좋은 책이나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엷은 우윳빛 코팅지가 한 겹 벗겨진 듯 첫 번째 보지 못한 장면이나 문장이 두 번째에 선명하게 보인다.

 


작년에 보지 못한 '사람'이 올해 보인 것은 아마도 출간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책은 일단 '노출'되어야 하는데 사회성 떨어지는 나에게는 대략 난감한 일, 옆 부스 작가들을 컨닝 해보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판매가 구매로 이어지기에는 너무나 냉정한 '영업의 세계'. 하지만 어디서 이런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그 배움조차 내게는 새로웠으니 늦둥이 책은 철부지 엄마에게 세상 이치를 가르쳐주는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다.







나름 한다고 했지만  늦은 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첫날에 앉아 있어야 했는데 가는 날 앉았으니 이미 사람들의 관심은 뜸해지고 역시 뒷북치기가 되었다. 히지만 뒷북이라도 쳤으니 다행, 뒷북조차 치지 못 한 상황이 발생했으니, 내 부스 옆에 박조건형, 김비 작가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끝날 때에야 알게 된 것이다.

(어느 현수막에선가 박조건형 이름을 봤는데 눈으로만 스치고 지나간 듯) 한겨레에서 연재된 '달려라 오십 호'로 김비작가의 팬이 된 내가 김비작가를 실물영접하게 되다니. 반가운 마음에 잠시 인사만 하고 마침 빅 스케치 행사 중이라 '끝나고 다시 올게요' 했는데 아뿔싸, 와보니 이미 부스는 철수된 후였다. 검색해 보니 작가님은 부산에서 활동 중, 이제 얼굴 보고 얘기 나눌 기회는 사라진 셈이다. 아! 이건 악몽이다. 뒷북치기의 악몽에  또 하나 추가!  

   


'있으면 행복하고 없으면 자유롭다' 목 터지게 자유를 외치는 나지만 이번에는 자유(그림) 보다 행복(관계)에 빙점을 찍었다. 페스타는 일 년에 한두 번, 비중의 균형은 다시 맞춰질 것이다.

내년에는 경주가 또 어떤 다름으로 다가올까. 아니 내가 또 어떻게 달라질까.

작년과 올해, 경주는 그대로인데 달라진 것은 결국 나였으니까.

여행지의 풍경은 여행자의 내면풍경에 따라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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