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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주 Oct 22. 2022

쓸쓸한 인생, 쓸쓸한 이웃

김훈의 <저만치 혼자서>을 읽고


오래전 김훈의 소설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을 읽으면서 그의 문체에 매료되었었다. 감정을 생략한, 간단명료하고 건조하고 냉정한 문장 안에 들어있는 정확하고 힘 있는 단어 구사, 그러면서도 신선하고 세밀하고 풍부한 묘사가 절묘하게 어울린 문장이 그의 글에 빠져들게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소설, <저만치 혼자서>를 읽으며 역시 김훈다운 문체에 감탄하게 된다. 여전히 담담하고 냉정하고 무심함 속에서 빛나고 있는 문장들!


작가가 말하는 ‘이웃’의 의미


“나는 한 사람의 이웃으로 이 글을 썼다.”

책 표지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문장이다.

서문이 없는 대신 책의 맨 뒤에 ‘군말’을 넣었기에 그걸 먼저 읽었는데, ‘군말’에서의 첫 문단 마지막 문장도 이 문장이다. 작가는 글을 쓴 마음의 환경을 이해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한 사람의 이웃’으로 썼다고 한다.


‘이웃’이란 단어에서 나는 ‘공감해 주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린다. ‘이웃’은 비슷한 계층, 비슷한 환경,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실제의 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인 옆집 사람과는 한 달에 한두 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 눈인사를 나누는 정도로 지낸다. 도리어 나는 혹시나 나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오지랖을 부리는 이웃을 만날까 봐 걱정하는 편이다. 도시에서의 이웃이란 서로의 생활에 예의 바른 거리감을 유지하는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행히 현재 우리 옆집 사람도 나와 같은 입장인 듯 보인다.


바로 옆집에 살지만 상대에 대해 전혀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가깝지만 먼 이웃’이라는 존재는 무심하고 건조한 김훈 문체와 잘 어울린다. 파편화된 개체로서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잔뜩 밀려오는 그의 글을 읽으면 어김없이 쓸쓸한 기분에 젖는다. 모든 인생은 ‘혼자’이며,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줄 뿐 이웃에게 어떤 ‘온정’도 드러내지 않는 글을 쓰는 작가가, 굳이 ‘이웃’으로서 쓴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가 말하고 있는 ‘이웃’은 등장인물의 삶을 가까이 지켜본 단순 거리감으로서의 ‘이웃’인지, 마치 자기 자신의 삶을 보는 듯한 친숙함으로서의 ‘이웃’인지, 서로에게 투명인간 같은 존재일 뿐인 현대 도시의 ‘이웃’ 일반을 말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어느 쪽이든 이웃이 어려울 때 발벗고 나서서 돕는 전통적 의미의 이웃이 아닌 건 분명하다.


소설집의 표제 ‘저만치 혼자서’는 일곱 편 중 한 편의 제목이지만, 일곱 편 전체에서 등장하는 인물 모두에게 참 잘 어울리는 문구이다. 시대와 얽혀 희생된 개인의 일상이든, 변화하는 사회에서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는 외로운 인생이든, 작가는 그들이 처한 상황들을 ‘전달’만 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해체된 가족


TV의 출연자들이 ‘언제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가족과 함께 할 때’라는 대답이 의외로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개인화, 파편화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가족에게서 사랑이나 휴식, 고독으로부터의 구원 등 정서적 안정을 얻고, 심지어 삶의 의미나 행복까지 찾는다. 다양한 조직에 속한 소속감이 옅어지고 해체되고 있는 요즘 가장 마지막까지 버팀목이 되어줄 단위로 아직은 ‘가족’의 힘이 대단해 보인다.


<저만치 혼자서>의 소설들에서는 가족을 찾기 어렵다. 주인공들은 가족이 처음부터 없거나 있었어도 이혼 등으로 혼자가 된 사람들이다. ‘명태와 고래’의 주인공이 간첩으로 오인받고 감옥에 있는 동안 그 가족은 연락을 끊고 떠나버렸다. ‘손’의 화자는 이혼을 했고, 같이 살았던 아들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다가 그 아들이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히자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 버리려고 한다. 남루한 모습으로 ‘혼자’ 늙어가는 남자들을 그린 ‘저녁내기 장기’에서 두 인물 중 하나는 이혼을 (당)했고, 한 사람은 가족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대장 내시경 검사’의 주인공도 이혼하고 지내던 중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첫사랑의 연락을 받았는데, 그 아들에 대한 취직 부탁을 위해서였을 뿐이다. ‘영자’의 두 젊은이는 비즈니스 커플로 동질감이나 유대감은 전혀 없는 동거 생활을 잠깐 했을 뿐이다. ‘저만치 혼자서’는 숭고한 삶을 살았으되, 가족을 이루어본 적 없는 수녀들의 쓸쓸하기 짝이 없는 마지막 길을 그리고 있다. 6·25전쟁이 소재가 된 ‘48 GOP’에서만 가족의 해체가 나오지 않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가족의 단란함 같은 건 느껴지지는 않는다.


작가는 사랑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는 ‘가족’이 ‘없는’ 사람들의 쓸쓸한 또는 실패한 삶들을 그려내고 있는데, ‘저만치 혼자서’ 관찰하는 존재로서의 ‘이웃’일 뿐이다.


작가는 '가족이 없는' 쓸쓸한 인생들을 그리고 있다.


무섭도록 냉정한 어머니와 생명을 부여잡는 손

일곱 편의 소설들 중에서 특히 인상적인 글은 ‘손’이다.

작가는 ‘군말’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로 한 소방구조대원의 인터뷰를 들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물속에 빠진 아이를 구조할 때 그 아이가 의식이 이미 혼미한 상태였는데도 구조대원의 손을 꽉 움켜잡았었다며 그 ‘손’의 강렬한 여운을 잊지 못하겠다고 했다.

소설 ‘손’에는 자살로 판명된 딸(성폭행 피해자)가 ‘자살’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아버지가 나오는데, 그 근거로 구조되는 순간에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구조원의 손을 (간절한 듯) 힘주어 잡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살고 싶은 아이가 왜 자살을 했겠냐는 아버지의 말은 가해자 철호의 어머니인 화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나의 시선을 잡아끈 건, 본능적으로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손’보다는 성폭행범 철호의 어머니라는 인물이다. 이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그녀는 이혼을 하고, 아버지와 살다가 어머니에게로 온 아들 철호와 살고 있었다. 능력 있는 회사원이었지만 기이할 정도로 아들에 대해 냉담하고 무관심한 그녀는, 아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참고인 조사로 불려갈 때까지 아들을 한 번도 면회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 후에는 아들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리고 이사를 가 버린다.

아들에 대한 냉정한 태도와 달리 화자는 뜻밖에도 피해자 아버지를 수소문해서 찾아가는데, 그 아버지를 만나기 직전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면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나는 그녀의 이런 태도가 무척 혼란스러웠는데, 거의 냉혈한으로 보이는 그녀가 피붙이인 아들 대신 피해자 연옥과 그 아버지에 더 관심을 더 가진 계기를 잘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성적 피해자인 ‘연옥’에게 더 감정 이입했을까? 아니면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연옥의 마지막 순간의 본능에 감정 이입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작가가 마지막 생명을 붙드는 ‘본능’에 주목해 이 소설을 썼다면, 나같은 독자의 이해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에 희생된 개인의 비극


<명태와 고래>는 비극적인 역사와 시대가 개인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폭로하고, 제도화된 폭력에 희생된 무고한 사람을 그렸다. 작가가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진실을 알게 될수록 두려움과 절망감을 느끼며 쓴 글이라고 한다.

주인공 이춘개는 남쪽과 북쪽의 폭력에 의해 번갈아 짓밟히고 제 땅에서 추방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는 가족에게마저 버림받는다. 수십 년간의 복역 생활 끝에 세상으로 나오지만, 특별히 아는 사람도, 갈 곳도 없는 그는, 북한땅이 되어 버린 그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운, 그가 잡혀가기 전에 살았던 어촌마을로 향한다.

이춘개는 그렇게 엄청난 일을 겪으면서도 두려움, 분노, 한탄, 절망 등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냥 상황에 이끌려 흘러가는 무기력하고 답답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뿐이다. ‘무기력한 개인’을 이보다 더 잘 그릴 수는 없어 보인다.

감옥 안에서부터 반복적으로 고향 어촌을 그리던 이춘개는, 출옥 후에 돌아간 제2의 고향 마을에서 수협회관을 빌려 그 그림들을 전시하고 나서,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의문을 남기며 소설은 끝난다.

나는 이춘개가 마음 붙일 곳(것)이 단 하나도 없는 이 세상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의미도 희망도 없는 삶을 포기했다고 본다. 오랜 감옥 생활 후 자유의 몸이 된 사람이, 바깥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기에는 아무런 목표도, 희망도 없는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이야기는 영화 <쇼생크탈출>에서도 나온다. 감옥보다 더 막막한 현실 세계!

이춘개에게 인생의 전부였던 장소와 장면을 그린 ‘그림’이 주는 의미는, 물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겠지만, 그 외에도 그곳에 갈 수 없는 무기력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현재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 살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걸로 보인다.



작가의 세밀한 묘사와 매혹적인 문장들은 대부분의 소설 속에서 빛나지만, 특히 책을 열면 맨 처음 만나는 이 작품 ‘황태와 고래’에서부터 내 마음을 빼앗는 문장투성이다. 밑줄 그으며 읽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 다 옮기는 건 불가능하고 몇 문장만 옮겨 보자면,


‘태백산맥이 해안을 바싹 압박하면서 가파른 경사로 물에 잠겼다.’ (p9)

‘고래들이 물위로 치솟을 때 대가리에서 아침햇살이 튕겼고, 곤두박질쳐서 잠길 때 꼬리지느러미에서 빛의 가루들이 흩어졌다.’ (p10)

‘수평선을 여는 아침햇살이 하구에 닿으면 빛들은 물줄기를 거슬러 퍼덕이며 상류 쪽 계곡으로 번져갔다. 물을 따라서 산냄새가 내려오고 빛이 골짜기로 올라갔는데, 보는 사람은 없었다.’ (p11)


죽음 앞에 외롭고 쓸쓸한 존재

표제작이었던 <저만치 혼자서>는 가장 쓸쓸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무너져가는 자신의 육신을 이끌고 타인의 죽음을 보살폈던 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삶을 소재로 썼다고 한다. 양신부는 72년생으로 40세에 죽을 때까지 임종을 앞둔 수녀들을 보살피고 임종을 돕는 상장례학교 교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에서 교장인 장분도 신부보다는 죽음 앞에 대기하고 있는 수녀들의 삶과 죽음에 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평생 헌신적이고 종교적인 숭고한 인생을 살았지만, 늙음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나에게는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영혼과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체념하고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스러져가는 수녀들의 모습이 한없이 쓸쓸하다. 신부님의 인도로 안식의 문으로 들어섰지만 그들의 죽음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는 평생 헌신적이고 종교적인 숭고한 인생을 살았지만, 죽음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영혼과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면서 서서히 스러져가는 수녀들의 모습을 그린다


<저만치 혼자서>의 문장들은 문장 자체의 빛남보다는 문장이 담고 있는 내용이 더 마음에 와닿는 편이다.


‘일상 속에서 거듭되는 죄를 거듭 사해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p233)

‘이 세상의 이유 없는 고통이 모두 하느님의 섭리라면 자신의 일(봉사일)은 하느님의 뜻에 맞서는 것이며 그 또한 섭리일 것이다.’ (p237)

‘기도 싫어요. 간구하면 잠이 더 안 와요. 신부님, 자고 싶어요. 영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p239)

‘죽음은 치유 불가능한 몸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구원의 문이다.’ (p243)


완전한 단절

김훈의 소설 속의 인물들은 사회와 시대에 녹아들지 못하고 따로 단절된 채, 방치된 채로 살고 있다. 특히 ‘영자’의 인물이 그러하다. ‘영자’는 작가가 공무원시험 준비학원이 몰려있는 노량진에서 이 세상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많은 젊은이의 절망을 보고 썼다고 한다. 시험 준비를 하는 두 젊은이는 단지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애정도 관심도 없이 철저한 비즈니스적 동거를 한다. 같은 처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어떤 위로도 주고받지 못하는 메마른 관계는 그들의 비즈니스가 끝나도록 변함이 없다. 결국 소설이 관계의 단절, 세상과의 단절로 끝나고 말아서, 나 역시 절망적인 느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노량진을 떠날 때 영자에게 -나, 간다. 잘해 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응답이 없었다.(p168)


제대로 된 인사 없이 문자 하나로 이별을 통보하고, 그에 대한 대답 없음이 내 가슴에 휭 하고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그 삭막한 ‘단절’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잘 드러난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요청에 의해 당분간 착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p184)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 무심함의 거리만큼이나 서로에 대해 심각한 갈등이나 다툼도 없다. 인물들은 애정이든 괴로움이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어떤 의지나 희망도 표현하지 않는다. 운명과 맞서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는 이들은 단지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긴 듯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바쁘게 돌아가는 이 세상과 이렇다 할 연결고리도 없이 혼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는 추레한 인생들에게서 단절되고 고립된 현대의 개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책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막막하고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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