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가 낳아주었다
내 이름은 아빠가 지어주었다
외할머니는 유년 시절 내내 나를 길러주었다
어린시절 난, 타지에서 근무하는 부모님 대신 동생을 돌보기 위해 수영을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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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나’를 되짚는 과정은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던 ‘나’를 확인하는 여정이다.
나에게 있어 최고의 여행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던 장소였고
나에게 있어 가장 맛있는 식사는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었던 음식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나’는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을 지운 나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된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되돌아보았을 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나를 설명하기에 있어 가장 큰 존재는 부모님이었다.
격한 사춘기를 앓았던 시절에는 그렇게도 미웠던 부모님이었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 미웠던 만큼이나 더 미안한 감정을 가지게 되는게 부모님이었다.
부모가 될 나이가 되어보니, 그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큰 자기희생이 따르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주일 전, 아버지는 두 번째 재발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미 간을 너무 많이 잘라내서 더 자를 수 없으니까,
이제는 정말 이식밖에 남은 방법이 없었다.
무서웠다.
타인에게 받는 간이식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직계가족인 나에게 의사는, 생체간이식을 하게 되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고,
수술 후 한 달간을 아플거라고 했다. 그 설명이 나는 무서웠다.
하지만 내게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은 아버지를 잃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더 이상 살아간 이유가 없는 빈껍데기일 것만 같았다.
아직 닥친 일이 아니기에 확신할 수 없지만,
분명,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살아갈 이유를 알 수 없게 되버릴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내 모든 것(가족)을 잃는 것이 어떤 것일지 여러차례 상상해봤기 때문인지.. 아이러니하게도 그 후 직장생활이 수월해졌다.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어떤 좋은 것을 준다고 해도 내게 남아있는, 아버지와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가는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승진을 빌미로 하는 큰 프로젝트나, 1.5배의 수당을 주는 야근 수당 따위는 내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두 번째 암재발은, 내게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것과 소중하지 않는 것을 가르는 큰 지표가 된 듯하다. 더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인생에서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딸이다.
나는 어머니의 딸이고 내 동생의 누나이다.
나에게 붙을 수 있는 수많은 다른 수식어들을 위해 밤새워 노력한 기억도 있지만,
이제와보니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게 남아있기 바라는 수식어는 우리 엄마아빠의 딸, 내 동생의 누나라는 수식어였다.
재발 진단을 받고 3일 뒤, 서울대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나온 아빠의 손을 잡고 나는 말했다. 아빠, 내가 간이식 해줄게. 걱정하지마.
그 말을 하기 전날 밤, 그 전전날 밤, 동생과 통화하며 밤새 울며 생각했다.
당장 내일 죽어도 좋으니 내 남아있는 생명의 절반을 아버지와 나눴으면 좋겠다고.
나에게 너는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내 동생, 내 가족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두렵다. 내가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을까봐 두렵다.
그렇게 됐을 때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이 없는 세상에서 나는 내 자신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