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의 길 찾기
장마가 시작되었다. 집 앞 상가에서 볼일을 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안에는 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나뿐이었다.
“저기요. 오관냉기지가 어디예요?”
나는 아이의 발음을 알아들을 수 없어 두 번이나 되물었다. ‘냉기지’가 ‘랭귀지’라는 것을 가까스로 알아챈 후 안내 게시판을 쭉 훑어보니 그런 곳은 없었다. 급히 휴대폰을 꺼내 검색을 하니 관련 검색어로 ‘오감랭귀지’가 떴다. 이 건물은 ‘우성메디피아’이고, 아이가 말하는 곳은 ‘우성애비뉴’ 건물 6층이다. 도와달라는 아이의 눈빛 때문이 아니라도,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거리뷰로 확인하니 나란히 있는 상가들 중 하나인 듯싶었다.
“따라와.”
잠시 그쳤던 비가 또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는 빈손이었다. 아이 팔을 꼭 붙잡고 왼쪽 건물을 향해 걸었다. 세찬 빗줄기에 내 왼쪽 팔과 왼쪽으로 맨 가방이 흠뻑 젖었다. 그래도 우산을 아이 쪽으로 더 기울였다. 옆 건물에 도착해 입구를 올려다보니 거기는 ‘우성에듀타워’였다. 신도시의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지 3년째, 상가를 매일 들락거렸지만 나는 아직도 상가 이름이 헷갈렸다.
“내가 저쪽으로 가서 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그럼 저 지각해요.”
“어차피 못 찾으면 못 가. 그래도 학원 찾아가야 덜 늦지 안 그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다 보니 ‘우성 애비뉴’라는 간판이 보였다. 왼쪽이 아니라 우리가 나온 건물 오른쪽에 있었던 것이다.
“근데 엄마는 어디 가셨니? 혼자 왔니?”
“엄마가 지하주차장에 내려주고 가셨어요.”
엄마가 아이를 옆 건물에 잘못 내려주고 간 모양이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몰랐을 테니 우산도 없이 아이가 이렇게 헤맬 줄 몰랐을 것이다. 건물 안으로 아이가 들어가는 걸 보고 나는 외쳤다.
“6층이야. 오감랭귀지. 잘 들어가.”
내가 손을 흔들며 크게 외쳤다. 그제야 아이의 얼굴이 방긋 웃으며 반짝 빛났다. 목소리가 너무 컸던지 지나는 사람들이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길을 못 찾는다. 고등학교 때는 집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 출구를 찾지 못해 두더지 게임하듯 출구마다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낯선 서울에서 쁘렝땅 백화점을 바로 뒤에 두고, 왔던 길을 서너 번이나 반복해서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매일 놀러 갔던, 10분 거리의 친구네 집을 찾지 못해 미로에 갇힌 것처럼 골목을 한 시간 동안이나 헤맸다. 길을 잃을 때마다 그깟 길 하나 찾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분노했다.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했다. 길 위에서 나는 고장 난 나침반처럼, 정확한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 다녔다.
지난 일요일 밤에도 나는 한 손에 지도 앱을 켠 핸드폰을 들고 을지로 어디쯤을 배회했다. 을지로에서 같은 길을 왔다 갔다 하며 또 20년 전 쁘렝땅 백화점을 떠올렸다. 그때 결국 모범택시를 타고, 4000원이나 되는 거금의 기본요금을 내고서야 1분 거리에 있는 백화점 앞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친구가 누구였는지 왜 거기에 갔는지는 잊었다. 하지만 쁘렝땅 백화점을 찾아다니던 내 모습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맬 때마다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난 화요일 오전 신촌역에 도착하여 계단을 오르려는데 어떤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나에게 길을 물어보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모르는 곳을 물어보면 어떡하지, 떨리는 마음으로 이어폰을 빼자 할아버지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어보았다.
“저도 잘 몰라...... 핸드폰으로 검색해 볼게요.”
하필이면 ‘세브란스 병원’을 찾으셨다. 작년에 병이 재발했을 때 세컨드 오피니언으로 다녀갔던 곳이 바로 세브란스였다. 그 짧은 순간에 할아버지가 잘 찾아가도록 잘 알려드려야겠다, 잘 찾아가셨으면 좋겠다, 간절함이 치솟았다. 지도 앱을 검색하여 3번 출구라고 알려드렸다. 할아버지는 내 설명을 듣고도 3번 출구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나도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지하철 역에서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크게 외쳐 불러 3번 출구 앞까지 모셔드렸다.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를 외치던 할아버지가 세브란스 병원에 무사히 도착하셨는지 궁금했다. 길 찾기에 성공했다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돌아오는 내내 병원 입구까지 갈걸 그랬나 아쉬움도 남았다.
길 좀 못 찾으면 어때, 물어보면 누구든 친절하게 내게 길을 알려줄 것이다.
길을 잃어버리면 제게 물어봐 주세요. 길을 잘 찾지는 못하지만 같이 가 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