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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May 02. 2022

꽃이 좋아지면 나이 든 거라는데 그래도 좋아.

봄이 오는 소리

이전까지 나의 삶은 출근과 퇴근, 퇴근 후에도 일을 하고 주말이면 옛날 아버지들처럼 잠을 자거나 대청소를 했다. 거의 일을 하는데 올인한 삶이었다. 특별히 여행을 많이 다닌 것도 아니고 술을 못 마시니 술자리를 갖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프고부터는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치병이라거나 시한부와 같은 연관어가 늘 따라다니는 병이라서 앞으로 남은 생이 얼마나 될지 알 수도 없는데 아등바등하고 싶지 않았다.


폐 절제 수술과 뇌전이로 인한 종양 제거 수술 후 병가를 내고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다방면으로 관심이 많아 일단 도전을 다 해보았지만 관심과 흥미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재능 때문에 오래가지 못해 다 포기하고 말았다. 통기타, 배드민턴, 재봉틀, 사진 찍기, 그림 그리기, 요리 뭐 그 외 다양한 것들. 그중 간절한 한 가지에 다시 도전하기로 했는데 그게 바로 사진 찍기였다. 사진을 찍으면 출사도 가고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어 덜컥 사진 밴드에 가입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사진 생활과 여행.


사진을 시작하면서 좋아하게 된 것이 꽃이다. 사진은 꽃을 따라다닌다. 봄이면 산수유와 매화를 시작으로 벚꽃, 수국, 능소화, 배롱꽃, 그리고 해바라기와 코스모스를 지나면 한 해가 3/4쯤 지난다. 나이가 들어 꽃이 좋아진 건지 사진을 찍다 보니 좋아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꽃이 참 좋다.


작년 3월엔 구례 산수유꽃을 보러 갔다. 주차 대란에도 노오란 산수유꽃을 원 없이 보았고 또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 화엄사 홍매화를 보았다. 동시에 광양에 매화가 한창이었다는 걸 뒤늦게 SNS를 통해 알고 무려 1년을 기다렸다.

주말에 비가 온다는 소식에 급히 떠난 봄꽃맞이 여행. 화엄사 근처로 숙소를 정했기에 도착하자마자 구례 산수유 마을에 들렀다. 늦은 시간이어선지 사람도 없고 한적하고 여유롭게 노란 봄꽃들을 만났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중략)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 김훈, 자전거 여행 중


아침 일찍 광양으로 향하는 길, 광양 초입부터 우리를 반기는 매화도 이쁘고 반가웠지만 더더욱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왼편으로 펼쳐진 섬진강. 예전에 김훈 작가님의 '섬진강 기행'에서 읽은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새벽에 여우치 마을을 떠나 옥정 호수를 동쪽으로 돌아 나왔다. 호수의 아침 물안개가 산골짝마다 퍼져서 고단한 사람들의 마을을 이불처럼 덮어 주고 있었다.' 김훈, 섬진강 기행 중


당장 내려서 자전거를 타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작년 가을 대나무 숲엘 다녀가긴 했지만 이렇게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섬진강을 만나니 새삼 우리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날 좀 풀리면 자전거 여행하러 꼭 다시 오자고 아쉬운 약속만 하고 광양에 도착했다.


어제 구례의 여유로움은 평일이어서가 아니라 저녁이어서였던가. 주차는 쉽게 한 편이었지만 평일 치고도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이미 매화는 만개하여 봄을 알리고 있었다. 온통 하얀 세상 속 홍매화도 보이고 또 빈 땅에 매화를 심느라 흙을 고르고 있는 농부도 보이고.

그동안 잘 몰랐는데 매화야말로 팝콘과 꼭 닮았다. 팝콘 강냉이 부분이 초록이거나 황토색이거나에 따라 청매실, 홍매실이 되는 건가.  내려오는 길 바람에 매화꽃잎이 날린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 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 중


지금이다. 봄이 오고 있다.


'강물은 마을을 따라 흘러가고, 길은 길을 따라 뻗어 가는데, 노령산맥을 벗어난 섬진강은 구례 곡성 쪽의 지리산 외곽으로 접어들었고, 지친 자전거는 순창에서 잠들었다.' 김훈, 섬진강 기행 중


여행을 올해 3월 14일에 다녀와 작성한 글입니다. 이제야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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