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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이 나를 빚어가네

by 모라의 보험세계

1. 일의 시작

동물보호센터로 지정된 컨테이너 건물 외벽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도안은 이미 결정되었고, 나는 그대로 옮기는 일만 하면 되었다.

미대 졸업장은 없지만 과거 그림책작가로 활동하고 전시경험도 있고, 아이들을 가르쳤고 지금도 취미미술학원에 다니는 나에게 동생이 SOS를 친 것.

고퀄리티의 벽화보다는 최대한 빠른 시간에 준공시점과 맞추어 해 줄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되었다 하핫~

경험이 없는 벽화에 대해 그림작업하는 동료들과 선생님께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칠하는 건 괜찮은데 문제는 날씨였다.

페인트는 영하의 온도에서 얼면 녹아도 사용이 불가하다. 작업은 영상일 때만 해야하며, 신나를 섞어 적절한 농도로 칠하게 된다.

신나가 많이 섞이면 얇게 발리면서 건조시간이 길어지고, 신나가 적으면 뻑뻑한 밀가루 반죽을 묻히는 느낌이 된다.

촉박한 시간과 열악한 날씨에 모험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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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장의 한계

높이 3미터 좀 안되는 도안 스케치는 분필로 슥슥 그으면 된다. 나는 선을 쓰는 것에는 큰 두려움이 없다.

현장에서 해야할 프로세스는 4단계이다.

스케치 - 밑색(흰색)깔기 - 1차채색 - 2차채색

총 3회의 채색을 최소 3시간 텀을 두고 해야하는데, 색칠한 것이 마르지 않으면 다음 작업이 불가능하다. 페인트가 밀려서 거지가 될 수 있으니까..^^;;

12월 중순, 혹한의 겨울날씨가 영상으로 따땃~해지는 날은 많지 않았다. 매일 일기예보, 날씨예보를 보고 또 봤다. 혹시나 더 좋은 날이 있을까 싶어서..

결론은 날씨예보를 토대로 모험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준공은 12월 말이기에 영하만 아니면 뭐라도 해야했다.

점심시간 잠깐 영상 1도를 웃도는 날을 정해 2시간 지하철을 타고 도착하였다.

스케치를 하고 밑색으로 흰색을 칠하기 시작! 오랫만에 큰 붓을 잡으니 와 좋다 좋아^^

센터와 연결된 담당자(지인)들의 도움으로 밑색칠하기는 무리없이 완료하였다. 착한 사람들..^^

3시간 뒤 해가 지면 영하로 내려가고 조명이 없어 다음 작업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귀가하고 다시 날씨를 보고 또 오기로 하였다. 그렇게 2일의 시간만 쓸 줄 알았으나 야속한 영하날 덕분에 결국 총 3회에 걸쳐 마무리를 하였다.


IMG_3278.jpg 유성페인트 냄새, 신나 냄새를 진하게 알게된 날 ㅎㅎ


3. 마무리

밑색 덕분에 한번만 색을 칠했는데도 선명하게 잘 보였다. 업무의 쫀쫀함은 어디서나 효율이 높군!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붓이 지나간 자국 아래 밑색이 보여 얼룩덜룩했다. 그래서 페인트칠은 최소 2회는 해야된다.

신나를 적게 섞은 곳은 두껍게 칠해져서 넘어갈 수 있으나 신나를 많이 섞은 곳은 반드시 한번 더 해야했다.

그게 내눈에만 보이는 것 같았다. ㅎㅎ

2022년 12월 31일 마지막날 채색을 하고, 2023년 1월 1일에 마무리를 위한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다 된것 같은데 또오셨네요 뭐가 남았나요"

"네, 마무리가요"

센터 직원분께서 웃으며 말했다. 나도 웃으며 붓을 들었다.

아, 저기 그림이 있구나- 하는 존재감을 느끼며 바쁘게 문을 오가는 사람들은 잘 모를 수 밖에 없다.

아, 저기 꼬리부분 색이 덜 칠해졌구나- 하는 부족함은 내가 한 작업을 보며 내가 느끼는 책임감.

그래서 2023년 1월 1일 새해 첫날을 지난 해의 마무리를 위해 사용했다^^

책임감은 '아, 당신 책임감이 넘치네요' 라고 말을 듣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책임감은 내 성에 차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원동력이다.

전문 벽화 작가는 아니지만 좋은 일을 하는 곳에 내 손이 노력해줘서 뜻깊은 연말과 연초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여러 번 붓으로 쓰다듬고 구석구석 확인한 것처럼, 보험상담도 마무리를 잘하고 보상청구도 책임감있게 지금처럼 쭉 하자며 올해 계획을 곱씹기도 했다.


output_3343031259.jpg 옷 세겹은 기본으로 껴입어야 2시간 서서 일할 수 있었다



4. 아쉬운 점

소나 돼지 등의 가축을 보호하는 축사는 가축재해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기견과 유기묘들은 보험가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보험세계에서는 동물들도 어떤 가치를 지닌 물건처럼 가액이라는 것이 설정되어야 하는데 유기동물들은 가액을 책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동일한 품종의 강아지 혹은 고양이라도 이 아이와 저 아이를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하기가 어려운 이유라고 들었는데... 생명의 숨을 같이 내쉬며 서로의 눈을 보고 감정을 나누는 반려동물을 생각한다면 참 슬픈 말이었다..

생명도 숫자로 표시할 수 있어야 가치를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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