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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 박중철 지음

by 모라의 보험세계


가정의학과 선생님이자 호스피스 의사이신 박중철 선생님.. 선생님은 날 모르겠지만 나는 선생님을 알아버리고 마음에 담아버렸다..!



웰빙의 마지막은 웰다이인데 무엇이 웰다이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지난 날.



뿌연 안개같고 멀리 흘러가는 구름같기도 하고 또 내 주위에 나를 위협하고 있는 인비저블 고스트 같은 것이 죽음이라는 존재였다. 그런 두려움을 가까스레 좋은 단어(well)를 붙여가며 미래의 공포를 조금 미리 잠재워버리려는 속셈이 웰다이를 외치는 내 마음의 일부였다.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라는 제목도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박중철 선생님의 글들은 일상에 익숙한 단어들을 나열해서 일상을, 인생을 생각해보게 하는 철학자같다고나 할까..!



오늘 읽은 부분을 머리에 담고, 또 다시 담으려고 그대로 적어보기.





삶은 늘 불예측성이 함께하고 양지와 음지가 공존한다. 하지만 생존만을 절대시하는 회피와 억압의 방어기제는 강박적으로 인생의 화려함과 밝은 면만 좇게 하여 균형 있는 삶의 시각을 방해하게 된다. 특히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초조함은 스스로를 늘 약자로 여겨 타인에 대한 연민을 차단하고 자아를 우선시하는 도덕적 이기주의에 빠지게 한다.



이렇게 처절한 생존경쟁으로 살아가는 한국인은 자신이 꿈꾸던 성공을 손에 쥐어도 잠깐의 우월감이 사라지면 그 어떤 만족과 행복도 남지 않아 삶의 혼돈에 빠지게 된다. 경쟁은 무한하여 살아가는 시간에 비례해 지치게 되고, 철학이 없는 성공은 금세 허무해지며, 실패에 대한 무시와 모멸은 늘 공포스럽기에 결국 삶의 포기라는 도피처를 선택하게 된다. 생존이 공포로 체험되는 한국 사회는 OECD 부동의 자살 사망률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60-61페이지)







공부, 공부, 무조건 공부와 등수만 외치는 학창시절과 탈출만 꿈꾸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10대인 나는 부모님과 선생님 세대와는 극명하게 적대관계에 서려고 했었지...ㅠㅠ 그러지 않아도 되는 시기였는데 공간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과외선생님이 살던 아파트에서 중학생이 투신자살을 하고, 이어서 다른 동에서도 같은 사망소식을 듣기도 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우울증에 걸렸던 같은 동 아주머니의 투신 후 모습을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어린 친구들이 발견하고 이후 어른들이 가리며 수습했던 장면도 아직 또렸하다. 어린 나에겐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개인을 개인으로 보기보다는 단체의 통상적인 모습에 개인이 섞이지 않으면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문화가 있었다. 시험 성적표를 나눠주며 1등에겐 박수를, 나머지 좌절의 몇십명들은 부모님의 싸인을 받아와야 했다. 왜 그랬을까?



내 이름이 모라라고 된 것도, 딸을 몰아서 나 하나로 낳았다는 크나큰 의미가 있다는데, 남아선호사상은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힘이 있어서 아들을 낳지못하면 우울증과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걸까?


살아오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또 이런 생각을 던져주는 고마운 저자인 의사쌤과 책이 있어서 감사하다.



웰다이? 지금은 잘 모르겠다. 경쟁사회에서 나도 어푸어푸 물을 먹으며 발버둥치고 있으니 아직은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거나 미소를 짓기는 어렵다. 그래도 그런 나를 바라보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스스로와 대화하고 조율할 수 있는 메타인지 정도는 얻었다.


경쟁은 무한하여 살아가는 시간에 비례하여 지치게 된다는 문장이 어찌나 뇌의 주름을 쫙 펼치게 하는지..! 정신이 번쩍 든다.



왜 돈을 버는지, 왜 내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유튜브를 찍고 글을 쓰고 일을 하는지 행동 하나하나를 그냥 넘기지 말자.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한다는 생각은 이제 지겹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어려운 수채화를 접고 수채과슈물감을 장만해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헷~


햇살이 잘 드는 큰 집과 한강뷰, 내 작업공간을 그리며 오늘도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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