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라류 May 03. 2023

등산, 또 속았다

등산, 또 속았다


철쭉을 보러 가잔다, 남편이.

지금 한창 만개했을 거라 한다, 등산을 즐기는 남편이.

여기 부산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합천의 황매산철쭉이 절경이라고 지금 아님  안된다고 그런다, 남편이.


"산? 등산? 난 별론데..." 내가 그랬다.

"산이긴 산인데.... 뭐 거의 평지야!" 남편이 그랬다.

"평지??!! 그래도 산 아니가?" 내가 그랬다.

"거의 정상까지 차로 올라가서 주차장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평지에 철쭉이 쫙 펴있단다. 그냥 산책하는 정도다" 남편이 그랬다.


15분 정도 산책 하는 정도라고... 남편이 그랬다.


그래서 근로자의 날, 금쪽같고 황금 같고 꿀 같고 달콤한 "근로자"를 위한 휴일에 눈 비비고 일어나 철쭉이 활짝 피고 있다는 황매산으로 향했다.


그날의 나의 "산책 패션"은 철쭉과 같은 색깔 맞춤으로  분홍색으로 신경 써서 나름 골랐다. 

"평지 산책길"의 철쭉 꽃밭과 어울릴 만한 분홍색 재킷과 청바지를 입었다.  신발은  스니커즈로, 그리고 핸드백도 멨다.  그래도 가죽 소재 핸드백 보단 꽃 산책에 어울릴만한 캐주얼 느낌의 니트 소재 가방을 들었다. 선글라스도 잊지 않고 챙겼다.


그래도 나들이라 그런지 설레는 기분으로 떠났다.

남편 말 대로 한참을 차로 타고 올라갔다. 구불구불한 산길이 아찔하기까지 했다. 주차장에 드디어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바람은 조금 찼지만 걸치고 온 재킷이 바람막이로 충분했다.


그런데 오고 가는 사람들을 찬찬히 보니 다들 등산복에 배낭을 멨다. 심지어 양손에 등산 스틱을 들고 먹을 것을 주섬 주섬 챙겨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분명 15분 거리의 평지라고 했는데, 하늘을 올려다 보니 저 멀리 끝도 없어 보이는 바위산이 보였다.   


산이다. 산. 누가 봐도 산.


이보시오 남편, 철쭉이 펴 있다는 평지는 도대체 어디메에 있소?


약간의 비탈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다. 나름 나쁘지 않았다.

평지 까진 아니었지만 걸을만했다.  철쭉은 이미 만개를 했던 건지, 약간 시들한 느낌도 있었고, 만개 중인 것인지 꽃몽우리가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그래도 예뻤다. 꽃자주 색의 꽃들이 올라가는 길마다 마다 피고 지고 있어  여기까지는 나의 분홍색 재킷이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등산 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산책도 아니었지만, 오솔길 같은 오르막을 걷는 기분은 충분히 즐길만했다.


그런데 이 오르막 오솔길의 끝, "평지"에서부터가 문제가 시작되었다.

오르막 끝에 보인 평지 너머, 저 멀리 산 정상에 눈에 띄게 보이는 바위들.  그리고 끝도 안 보이는 계단들. 나는 되돌아가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런데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올라가 보잔다,  남편이.

그냥 계단만 올라가면 정상이라고 했다, 남편이.

한 30분만 올라가면 정상이란다, 남편이.

손끝을 가리키면서 금만 올라가면 된다고 했다, 남편이.


한번 속지 두 번 속으랴만, 속았다.

나는 두 번을 속았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천국의 계단인가, 끝이 없어 보이는 계단을 하나 둘 오르기 시작하니 한 계단 한걸음 올라갈 때마다 걸치고 있던 재킷이 얼마나 걸리적거리고 까칠했던지, 뻣뻣한 소재의  재킷이라 움직임이 더 버석거렸다. 계단만 오르면 정상이라고 했는데, 계단의 끝에 기다리는 건 거의 암벽 타기 수준의 바위들이었다.


저길 어찌 타고 올라가랴.

치렁치렁하기만 한 재킷을 벗어던져버릴 수도 없고

스니커즈 밑창은 부드러운 흙에 미끌렸으며

크로스로 멘 가방은 걸음을 뗄 때마다 내 다리를 툭툭 쳤다.


산을 타는 사람들은 가벼운 등산복에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스틱을 찍어 가며 날다람쥐처럼 펄펄 뛰어 날라 올라가던데, 나는 이 뻣뻣한 재킷에 미끌거리는 스니커즈는 나의 온 다리 근육의 힘을 한 곳으로 모으며, 이 울퉁불퉁 아슬아슬한 바위를 기어 올라가다시피 하여  겨우 겨우 올라갔다.


나의 이 돋보이는 핑크색 재킷이여.

나의 이 미끌거리는 스니커즈여.

나의 이 걸리적거리는 니트 가방이여.


산책이라는 명목하에 선택된 나의 옷 차림새는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등산객들과 단단한 바위산 위에서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산책이라는 말을 안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평지라는 말을 안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분홍 재킷 대신 후드 점퍼라도 입었을 것을.


그래, 나는 꽃놀이를 위해 기꺼이 속아 주었다고 치자.

황금 같은 나의 꿀 같은 휴에 황매산 한 자락에 "분홍색 재킷"입고 등산한 사람으로 기억되길, 나는 기꺼이 속아 주었다고 치자.


다음엔 평지라고 해도 안 속아야지.

정상까지 얼마 안 걸린다 해도 안 속아야지.

애들도 가는 산인데 왜 못 가냐는 말에 또 안 속아야지.


다음엔 "산"이라면 무조건 등산복이나 운동복 그리고 등산화를 신을 것이다.


(* 구두라도 안 신길 천만다행이다 싶었던 하루였다)

등산복 사이에 꿋꿋이 빛났던 나의 분홍색 재킷
황매산 정상이 보인다
철쭉이 참 예쁘게도 피어있더라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엄마는 할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