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뜨거운 대지에 뿌려지는 강한 햇살과 초록을 느끼고픈 시기에 이 어김없이 오는 비 손님으로 여름을 즐기고픈 마음에 약간의 브레이크가 밟히는 순간이다. 뿌리칠 수도 없는 이 자연의 힘에 우린 고작 우산과 비옷이나 장화로 그 반가움을 저항해 본다.
6월이 시작되면서 뉴스의 끄트머리에 나오는 일기 예보엔 장마가 언제쯤 시작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예고장을 날려주지만, 그저 조금 빗겨 난 예보가 되길, 최대한 늦추어 천천히만 오기를 바라는 작은 마음으로애써 들어도 못 들은 척 지내다 시간은 흘러 이렇게 장맛비가 쏟아지는 날까지 와 버렸다.
꾸물꾸물 흐린 하늘에 텁텁한 습기가 진했던 일요일 오후. 곧 비 손님이 올 것만 같은 하늘이었지만 그래도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저녁 산책을 나가야겠어서 우산하나 챙겨 들고 집 앞 공원을 가던 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은 곧 비를 뿌려줬고 텁텁했던 공기는 시원한 공기로 바뀌고, 메말랐던 바닥은금세 질척 질척한 땅이 되어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어내야 했다.
다행히도 나는 집에서 챙겨 온 우산 덕분에 비를 맞지는 않았으나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니, 외출 시에 미처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아 비를 그냥 맞고 다니는 사람들과건물 처마에서 비가 그치기 바라는 사람들이 삼삼 오오 모여있었다. 아마도 일기예보가 빗겨 나가길 바랐거나, 오늘만은 아직은 비가 내려주지 않길 바랐을 마음이지 싶었다.
한두 방울의 비는 어느새 장대비로 바뀌었다. 더 이상 발을 내딛기에 버거운 폭우로 발길을 되돌려 집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건널목 길이었다. 내 옆을 보니 우산 없이 그 장대비를 쫄딱 맞고 서 있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혼자 어디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비를 만난 모양이었다. 아마도 집에 가는 그 시간까지는 비가 오지 않길 바랐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지.
치렁치렁한 긴 머리는 비에 젖어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주변에 친구나 부모처럼 보이는 어른도 없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여자 아이 옆으로 다가가 우산을 씌워줬다.
요즘은 하도 이상한 사람도 많은 터라 그 아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잠시 바라봤지만, 그냥 평범한 아줌마인 나의 모습과 우산을 씌워주는 고마움에 말없이 함께 우산을 쓰고 건널목을 건너갔다.
"어디까지 가니?"
" xxx 아파트까지요"
여기서 최소 10~15여분을 더 걸어가야 하는 거리다. 내가 데려다 줄수도 없는 상황인데 "버스 타고 가려고요"라고 내 마음을 읽었는지 먼저 본인의 계획도 얘기도 해준다.
"그래, 그럼 버스정류장이 아줌마 집 가는 길에 있으니 거기까지 같이 가자"
묵묵히 같이 걸었다. 어색함의 침묵에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릴뿐이다.
"중학생이니?" 내가 먼저 침묵을 깼다.
"아니요 초등학생이에요"
"어머... 키가 커서 중학생인 줄 알았어. 6학년? "
" 5학년이요"
" 어머... 키가 참 크다... xx 초등학교?"
" 네..."
아이의 멋쩍은 미소가 우산 아래로 보였다.
다행이다. 요즘 아이들 까칠하고 무섭다고 하는 10대인데, 낯선 아줌마의 질문에 친절하게도 대답도 잘해준다.
버스 정류장이 눈앞에 보이는 갈래길에서 나는 우리 집 방향으로 몸을 틀며, "조심해서 잘 가"란 인사와 함께 아이를 보냈다.마음 같아선 버스정류장까지 가서 가는 것까지 보고 싶었으나, 그럼 나의 너무나 넓은 "오지랖"에행여 불편하거나 부담스러울 수 있기에, 그냥 적당한 거리에서 나는 아이를 보냈다.잠시 5분여 시간이었지만아이는 비를 조금 덜 맞았고, 나는 나의 우산으로 작은나눔의 기쁨을 맛보았다.
이 순간, 이 장마의 시작에 떠오르는 말이 생각난다. 시쳇말로 "낄낄 빠빠"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란 말로, 치고 빠지는 센스가 필요한 낄낄 빠빠의 센스가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