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탈리아 여행(9), 떠나기 전

우연한 만남

by 라라

※ 1년 전 기차 안에서의 우연한 만남에 대해 기억을 더듬으며 적어본다.


작년 초, 서울에 갑자기 일이 생겨 하루 당일치기 상경했던 날이 있었다.

빠듯한 일정에 제때 끼니도 챙겨 먹지도 못하고 바삐 일을 마치고,

늦은 오후 샌드위치 하나 사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의 일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새벽부터 분주했던 피곤한 눈꺼풀이 무거워 감겼지만 일단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기에,

내 옆자리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고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적당한 배부름에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상모를 돌리며 한참을 졸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기차는 동대구역에 정차했다.

한참을 졸고 눈을 떠 주위를 보니 그때부터 내 옆자리의 한 중년의 남성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분명 외모는 한국 사람 같은데, 옷차림새와 덥수룩한 수염이 긴가 민가 하는 와중에,

통로 옆 외국인 일행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대화를 주고받기에

어쩜 해외 교포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기차는 종착역인 부산역으로 다시 향해 갔다.


기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내가 동대구역에서도 하차를 안 한 것을 확인한 그 중년의 남성이

대뜸 말을 걸었다.


그것도 "한국말"로!

그것도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오는 "질문"으로!


옆 :부산 잘 아세요?

나 :아... 네! ( 띠용! 어머! 한국 사람 맞네... 저 부산 사람 입니다만...)


옆 : 아~제가 딸이랑 여행을 왔는데, 딸이 무작정 부산 오고 싶다 해서 가는 길인데, 딸은 외국사람이고 저도 한 30년 만에 부산 와 봐요~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뭘 먹어야 할까요? 맛집 하나 알려주세요.

나 :....... (두 번째 띠용! 아빠는 한국사람인데 딸이 외국인?

그리고 갑자기 이 넓은 (?) 부산에서 오늘 저녁밥 메뉴와 맛집을 추천하라고? )


갑자기 나의 머리와 눈은 초점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여행에서 밥집 추천이라니, 순간 딱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옆: 숙소는 서면으로 잡았어요. 그럼 부산역 근처에서 뭘 먹을까요??

나:......(세 번째 띠용! 응?)


서면과 부산역의 거리감에 또 순간 눈이 흔들리며 당황했던 순간이었다.

나의 머뭇거림을 눈치챘던지, 그 중년의 남성분께서 먼저 메뉴를 제시해 주셨다.


옆 : 부산에 그 유명한, 무슨 국밥 있죠?

나 : 아 ~~ 돼지국밥요?


그런데 난 부산 사람임에도 돼지국밥을 못 먹는다. 그러니 맛집을 알 길이 없었으니 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또다시 정적이 흐른 뒤 뭐라도 추천을 해야 할 듯해서,


나: 음... 그럼~ 부산역 근처. 자갈치 시장에서 회 드시는 건 어때요?

옆: 아~자갈치 시장. 들어봤어요~좋네요. 회!


그러더니 그 중년 남성분은 검색을 하면서 자갈치 횟집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나: 그런데 따님이 외국분이신데 회 드실까요?

옆: 아~실은 우린 이탈리아에서 왔어요. 이탈리아에서도 회 같은 거 잘 먹어요.

딸은 이탈리아 사람이에요. 와이프가 이탈리아 사람이라서.


그제야 이해된 이 가족 구성원.

아빠, 그리고 딸, 그리고 그 딸의 남자친구가 아빠의 나라, 한국으로 여행을 온 것이었다.

내 눈엔 그저 신기하게만 보였다.


그 뒤로 대화는 밥집이 아닌 이탈리아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었다.


4월 예정이었던, 나의 이탈리아 여행 계획을 시작으로 끊임없었던 대화.

그분의 가족 이야기부터, 현재 거주하는 도시 앙기아리(앙기아리 전투)에 얽힌 역사,

그리고 토스카나 지방에 대한 자랑,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피렌체와 우피치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 중인 작품들과 그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들,

특히 카라바조 전시회를 보고 난 이후여서 카라바조와 그 작품에 대한 일화 등,

우리의 대화는 어느덧 이탈리아에서 미술사까지 다양하게 아우르고 있었다.

근래 들어 이렇게 미술에 박식한 "중년의 아저씨"를 본 적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은 투영 기하학을 공부하는 중이라 그림 등에 조예가 깊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대화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이렇게 취미나 관심사가 맞아서 대화의 티키 타카가 잘 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부산역 도착 방송이 흘러나왔다.


짐과 주변 정리를 하고, 하차 직전 이탈리아 따님과 그 남자친구분에게

"즐거운 여행 되세요~"라고 한국말 인사를 하며 우리들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면서 다음에 꼭 토스카나와 앙기아리로 놀러 오면 연락하라고 하셨다.

연락처는 주고받지도 않은 채...(쿨하다)




일여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문득 그날 저녁 그 가족들이 모두 자갈치에서 맛있는 회를 먹었을지,

부산의 여행은 어땠는지, 이탈리아로 다시 잘 돌아갔는지 가끔 생각나고 궁금하기도 하다.

그런 궁금증 가득 남은 그날의 기억을,

작년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즐겁고 신기했던 만남을,

이렇게 기록에 남겨둔다.


성함이라도 여쭤볼걸...

그 흔한 SNS계정이라도 알아둘걸...


이런 약간의 아쉬움은,

언젠가 나를 다시 이탈리아로 떠나게 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