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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류 Feb 20. 2023

기억은 액체

지금 이 순간

기억은 액체다.

시간이 지나면 수분이 증발해 건조해지거나 퍼석해진다.

때론 완전히 메말라 버리기도 하고.

그래서 그 기억의 액체가 모두 증발해 버리기 전에 수분을 다시 촉촉이 채워줘야 한다.

수분을 채워 줄 수 없다면 액체를 "고체화" 시키는 작업을 자주 해줘야 한다.


"그 친구, 거기 사는... 그 아파트... 이름이... 그... 하이브리드 아파트? 있잖아 거기..."

" OO동  힐스테이트? "

"어어 힐스테이트 거기. 거기 사는 친구  "


콩떡 같이 얘기해도 찰떡 같이 알아먹는 개그 같은 이 상황.

모임이 있어 나가는 차 안에서, 나를 데려다주는 남편에게

오늘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에 대한 설명을 하는 와중에

그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아파트 이름이 왜 생각이 안 났던지.

대충 H로 시작되는 단어로 입 밖으로 내뱉었지만,

그걸 또 찰떡같이 알아듣는 남편이 고맙다.


순간순간 내뱉어져야만 하고

순간순간 대화가 이어져야 하는 때에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과 사건들 얼굴들.


기억은 금방 증발해 버리는 액체인가 보다.


세월에  비례하여 증발해 버리는 기억의 속도는

가히 내가 인간인지 "물고기"인지 가끔 혼란스러울 때도 있을 정도다.

특히 요즘은 그 수분함량에 알코올 성분도 들어가진 듯,

그 증발속도 보다 더 빠르게 휘발되어  버리는 듯하다.


오늘 같이 건조한 나의 기억력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수분을 다시 채우던지,

반복적인 읊조림으로 기억의 수분량을 유지시켜 주던지,

아님 어딘가 기록하고 적어두는 "액체의 고체화"작업을 무던히도 자주 해 둬야 한다.


나뿐 아닌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책상 위엔 포스트잇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폰 캘린더에는 큰 약속부터 사소한 일과까지 깨알처럼 등록이 되어있고,

그 캘린더의 기록마저도 못 미더워 알람도 그때그때의 일정마다 1시간 전, 하루 전 등의 옵션을 줘 가며 설정해 놓고 있다.

읽는 책마다, 책 표지에 읽기 시작한 날짜를 내 이름과 함께 적어둔다.

다 읽고 나면 어딘가에 독서 노트도 남겨둔다.

책꽂이에 먼지와 쌓인 책들을 가끔 꺼내 볼 때면,

책표지의 날짜로 내가 언제 읽었는지 기억을 되살린다.


이런 일련의 사소한 "고체화된" 습관이 나의 메말라 버리는 액체의 기억들을 조금 더 수분감 있게 보존 시켜 주는 듯 하다.


남편과의 대화 끝에, 때마침 라디오에서 노래가 나온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이 나의 기억의 액체 함량은 100% 꽉 채워진 신선한 기억이 아닐 리 없다.


P.S 지금 이렇게 일기를 적는 것도 고체화 작업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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