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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u Nov 12. 2021

잠적

이참에 의미 없는 번호를 지우자 생각했다. 내가 세운 의미 없는 번호의 기준은 이랬다. 1. 연락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 2. 연락하고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 이렇게 간단했다.


한 4년 전쯤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이상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20대 사회 초년생 시절, 사람들과의 관계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게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싶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땐 또 분명 나의 에너지가 그랬었겠지.라고 생각되면서도 그 시간을 좀 더 나.에 집중하는 시간으로 보냈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크다.  


얼마 전 4년 정도 쓴 핸드폰과의 이별과 동시에 새로 들인 내 핸드폰으로 전화번호 데이터를 옮긴 차제에 전화번호 목록을 들여다보다 이참에 정리 좀 다시 하자.싶었다. 평소에는 전혀 연락하고 지내지 않은 전화번호 혹은 이 사람이 누구였더라.싶을 정도로 아마 의례적으로 저장됐을 전화번호들이 많았다.


고민하지 않았다. 과감하게 지워나갔다. 지운 번호 중 관계 혹은 인연에 대해 미련이 남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깔끔했다. 지우고 나니 깨끗하게 내 방을 정리한 듯 개운함마저 들었다. 가끔은 우리에게 이런 정리들이 필요하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인간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기대가 내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이 한 순간에 서운함으로 돌변해 내게 상처 준다는 것을 알기에, 고로 기대를 하지 말라. 혹은 말자.라는 말에 동의하며 인정한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상대방의 마음은 늘 내 마음 같지 않은 것 처럼. 그리고 타인은 나.에게 혹은 내 삶에 생각보다 관심이 전혀 없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타인에 대한 내 기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관계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회의적인, 염세적인 것은 더욱 아니다. 단지 타인의 말과 행동에 신경 쓰지 않음과 개의치 않음, 휩쓸리지 않겠다는 나의 단단한 의지이며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혹은 힘들게 하는 것들에 대해 "So what?"으로 응수할 만한 그런 성격의 태도이다.


무뎌진 것도 있다. 타인들과 연락하고 지내지 않는다고 해서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이러다 인연이 끊기는 것이 아닌 가에 대한 생각에서 편해졌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결과 사람의 인연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해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요 몇 년 새 내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욱 편해졌고 성숙해졌고 심지어는 자유로움마저 든다.


전화번호를 지워 나가고 정리하는 일은 그래서 내게 인간관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하는 이유다. 내게 이따금씩 소식을 전하고 안부를 묻는 내 사람들의 전화와 메시지는 그리 반가울 수가 없으며 앞으로의 내 인생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쌓아나가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지금까지 이어져온 내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지켜나가자.는 생각이다.  


잠적 중이다. 가끔 친구들은 내가 연락도 도통 없고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바쁘냐고 애정 섞인 말투로 얘기하곤 한다. 연락이 왔는데 답을 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기에, 이번엔. 다른 사람들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소홀했던, 홀대했던 내 자신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온전히 쏟고 싶다.는 생각이다. 아마 마흔이 넘어서도 이 생각과 행동은 변함이 없을 것 같다. 홀로서기가 현재 무탈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 같아서 만족스럽다.  


잠적 중에도 그 많던 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생각에 대한 아쉬움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땐 또 내 에너지가 그랬을 것이고 지금은 돌고 돌아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내 삶도 인간관계도 더 편해지고 자유로워진 것 같아 인간관계.로만 따지자면 지금이 더 좋다.


나의 잠적.은 나의 정서적 홀로서기.와 동의어이며 잠적의 자유로움을 경험한 이후로 이를 멈출 수가 없게 됐다. 다행히도 내 잠적. 이만하면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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