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전기밥솥이 없다.(이하 밥통이라 하기로 한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고 몇 개월 전, 특단의 조치로 바로 처분했다.
흰밥을 좋아한다. 고슬고슬 고봉밥(꼬들밥을 그리도 좋아한다)에 멸치와 된장을 넣고 지진 시래기 하나에, 널찍이 두껍게 썰린 오돌뼈가 두 개 정도 박혀 있는 삼겹살 한 접에, 갓 한 푹 익은 무가 들어간 고등어찜에 든 두툼한 고등어 살 한 점에, 두부와 소고기가 들어간 청국장 한 국자에, 햄과 양파가 들어간 감자볶음에, 맛소금으로 간이 알맞게 밴 계란 후라이 하나에..., 셀 수 없이 많은 음식과 언제나 찰떡궁합인 건 역시 밥 중에도 흰쌀밥만 한 것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밥통을 없앴다는 소식에 주변에서는 "아니, 왜? 밥통이 없으면 밥은 어떻게 해 먹어? 이그, 또또 왜... 에서부터 그래도 사람 사는 집에 그것도 가뜩이나 혼자 사는 집에 밥솥의 연기와 온기와 온도는 있어야 한다. 는 설명까지... 핀잔 아닌 핀잔도 여러 차례 들었다.
특단의 조치였다. 내 딴엔 이러다 살이 내 청바지를 뚫을 것 같은, 치마 옆 퉁이를 뚫을 것만 같은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허벅지가 터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며 서둘러 예방조치를 내린 셈이다. 본디 집밥 자체를 좋아해서 사 먹는 것보다는 귀찮아도 뭐라도 집에서 해 먹는 스타일인데, 몇 개월 전 그러니까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그즈음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 끝내고 집에만 오면 밤 11 시건 12 시건 밥을 먹고 잤고 다음 날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계속해서 밥만 찾고 있는 게 아닌가.
밥 그 정도 먹는 게 뭐 어때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밥을 한 번 하면 보통은 세 끼 정도는 먹었는데 그때 나는 늦은 밤, 한 끼에 그 한 통을 다 비웠다는 게 문제였다. 식겁했다. 배가 그리 고프지 않은 상태에서조차 먹게 되고 먹고 나면 그 배부름으로 인한 기분 좋지 아니한, 불편한, 기분 나쁜 그런 감정을 겪는 상황이 이주 정도 반복됐다.
개인적으로 의식이 깨어있으면 식욕조차 내가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분명 내 안에 탈이 난 게 틀림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나 같지 않은 내 모습을 자각하게 된 순간, 밥통의 코드를 뽑은 후 그 자리에서 이별 선언을 했다. 평소 먹는 게 나의 생활이고 태도고 내 정신상태와도 엄청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인데, 어찌 이랬던 거지.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도 인정. 그러나 그놈의 스트레스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무튼 정신이 흐트러졌음은 분명했다.
너무 배불리 먹어서 혹은 몸이 무거워졌을 때 찾아오는 그 불편한 감정을 난 지독히도 싫어한다.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체중관리를 하며 살지는 않지만 이런 불편 감정들이 가급적 오지 않게 늘 깨어있으려고 한다. 내가 생각하는 체중은 체중계에 올라가서 재면 나오는 수치화된 숫자가 아닌, 지극히 내 스스로가 느끼는 몸의 무게로 측정한다. 그 기분이나 무게감으로만 설명한다면 불과 몇 달 전의 나는 분명 과체중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밥통과 이별한 후 그렇다고 밥순이가 밥을 안 먹을 순 없었다. 내가 선택한 건 낱개로 하나씩 데워먹을 수 있는 밥이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난, 밥 한공 기만 먹어도 배부르던 원래의 나.로 돌아오게 됐다. 호랑이가 물어갈 일이었다(할머니께서 습관처럼 늘 하시던 말씀이다) 식욕에 내 정신이 무릎을 꿇었단 말이지... 그래도 밥통 한 솥은 너무 하잖아!! 정신 차리잣!이라고 수도 없이 외쳐댔던 결과일 테다.
사실 살이 찌든 빠지든 그게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로 인한 내 감정이 그러한 불편한 감정들로 채워지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여전히 밥통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밥통을 다시 불러들일 마음이 없다. 가끔은 밥통의 온기가 생각날 때도 있지만 그리우면 주물냄비로 솥밥을 지어먹으면 될 일이다.
어느 것 하나 날 자각하게 만들지 않는 게 없는 것 같다. 밥통 하나로 여기까지 오는 나의 생각 고리는 여전하다는 생각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