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디에선가 본 문구였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마라." 분명 어디에선가 우연히 보고선 스치듯 기억해 놓은 것일 텐데 도통 어디에서였는지 기억이 없다.
이 말이 그때 왜 그리도 내 마음을 울렸는지. 한 동안 내 프사에 저장돼 있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내 뒷모습과 함께. 왠지 모를 불안과 무기력함으로 꽤 오랜 시간 삶의 방향을 잡지 못했었다. 일은 일대로 하고 있었으나 확신할 수 없었고 내 이상과 내 현실의 갭은 점점 커져만 갔던 시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당시 그대. 는 나로 감정이입이 됐고 내 스스로에게 그러니 사라지지 마라.라고 계속해서 속삭이는 듯했다. 지금도 한창인 나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나인데, 그땐 지금보다도 훨씬 아가의 상태였음에도 마치 이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없을 것 만 같은, 실패자가 된 것처럼 생각했는지. 이 또한 내 어리석음의 죄. 였을 터다.
"그땐 왜 몰랐을까. 그땐 도대체 왜 그랬을까."라고 무심코 말하기라도 하면 언니는 "아니야, 넌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아마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라고 한다. 흠... 글쎄. 그랬을까.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며 생각에 잠긴다.
꽤 긴 시간 날 옥죄었다. 무기력감, 우울, 불안, 후회 이 4종 세트가 이렇게 무서운 것일 줄이야. 나는 알면서도 일어설만하면 도로 넘어지고 하기를 반복했다. 이 반복적인 상황은 내 일상을 조금씩 좀 먹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하고자 하는 것은 곧잘 해내었고 대학시절엔 원하던 대로 조기졸업도 했고 외국계 첫 지원에 한 번에 붙는 행운도 얻었기에 내 인생은 어찌 보면 평범하지만 평탄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었다. 가만히 있어도 조금은 튀는 외모와 성격으로 어딜 가도 주목을 받기도 때로는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타인이 보는 내 이미지에 도취된 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서른이 되던 해, 지금 하는 내 일의 5년 뒤, 10년 뒤의 모습이 그려졌다. 시간이 갈수록 연봉도 높아지고 퇴직금도 쌓이고 속된 말로 여자로서는 이만한 직업이 없다는 말도 일리 있었다. 하지만 난 넘어져도 설령 실패하더라도 내가 진짜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결정엔 지체 없었다.
여전히 감사해하고 있는 그 시절 나의 멘토들은 내 결정에, "그래, 잘 생각했다. 초아 넌 여길 나가면 훨씬 더 빛이 날 거야. 넌 분명 잘 될 거다. 나도 30년 넘게 일했지만 변하지 않아. 응원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심지어 추천서도직접 써주셨다. 추천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수도 없이 받아왔지만 단 한 번도 써준 적이 없다고 하셨다. 이 추천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하시면서 써주신 추천서엔, "...... , **이라는 틀을 벗어나 보다 창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분야에서 활동해 볼 것을 권고한 적이 있음.."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때 그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쩌면 나 자신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평가나 진단 없이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 능력, 잠재력을 나는 그게 곧 나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그랬다. 그랬기에 어느 날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무기력과 절망을 느끼게 되었다고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볼까 혹은 보는가. 에 방점이 찍혀서는 안 되었다. 나 스스로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 에 방점이 찍혔어야 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타인의 시선과 생각에는 관심이 없으며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며 과거의 나가 아닌 어제의 나와 비교하며 내 삶의 고삐를 다잡는다.
과거의 화려했던 나의 모습도, 지난 영광도 그 시절이었으며 지금의 나는 화려하지도 않지만 화려하지 않으면 어떤가. 대신 마음의 평안과 안정과 삶의 여유를 얻게 되었으니 화려함은 이제 전혀 부럽지 않다.
이제는 그 시절을, "그땐 그랬지...^^"라고 청춘 초아 시대.라고 이름 붙일 만큼 흔들림 없는 마음이 됐다.(MZ세대 정의대로라면 난 아직 MZ세대이며 청춘이다. 청춘에 어디 나이가 있으랴) 방황했던 그때 외국으로 떠나면서 그 시절은, 참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나를 객관적으로 명확하게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그저 살아가는 거구나. 삶의 의미는 굳이 찾지도 없어도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살면 된다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돌고 돌아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당시에는 날 좀먹는다고 생각했던 부정적인 모든 감정들이 지금은 내게 피와 살이 되고 있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 는 존재할까.라고 생각할 만큼 충분히 아파했고 그 덕분에 내 삶을 정확하게 통찰할 기회를 얻게 됐다. 이보다 더 한 선물이 있을까.
무엇보다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밟히지 않을 만큼의 단단함과 잡초 같은 성미를 얻게 됐다는 점에서 더욱이 그러하다. 이제는 두렵지 않다. 불안 역시 와도 그때 잠시 뿐이다. 불안도 우울도 내 생각이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알기에 그때마다 내 생각을 정열 하면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