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에 만족하는 낭만

by miu

늦은 밤, 며칠 전 개어 겹겹이 포개 놓은 옷들이 기울어져 흐트러진 모양을 보고선 무의식적으로 옷을 집어 들었다. 그러면서 마치 고상한 의식을 거행하듯 얌전히 가지런히 팔부분부터 각을 잡아 다시 잘 접어 원래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빨간 맨투맨을 접으면서 생각했다. 한 달 전쯤이었던가. 언니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옷이 본인이 생각했던 원단이 아니었다며 입으라고 주고 갔다. 옷을 전혀 사지 않은 지가 꽤 되었던 터라 웬 떡이람. 하고선 받았다. 맨투맨 앞에는 부드러운 촉감의 흰 털실로 MINE이라고 적혀있었으며 속은 기모 안감이라 따뜻했다.


예전 같으면 내가 직접 사지도 입지도 않았을 스타일의 캐주얼 맨투맨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아주 옹골차게 잘 입고 있으며 예전은 매일같이 소비하던 세련되거나 예쁜 옷들은 이제는 왜 이리도 내게 화려하고 과하게 느껴지는지 관심조차 가지 않는 아이러니에 나는 가끔 나의 이런 변화가 황당할 때가 있다.


고백하건대, 지난여름 길거리에서 같은 디자인에 색만 다른 박시한 티 3개를 산 이후로 지금껏 단 한 번도 옷을 산 적이 없다. 정말 관심이 없어졌으니 나도 신기할 따름이다. 12월엔 언니가 옷 정리를 대대적으로 할 예정이니 시간 될 때 집으로 들러 입을만한 옷이 있으면 가져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소위 개이득이라며 꽤 부피가 큰 런더리 가방을 가지고 야심 차게 달려갔다.


완전 새것 같은 것도 바로 잽싸게 챙겨 넣은 것은 물론이고 언니가 대학생 때 입던 꽤 오래된 그렇지만 요즘엔 잘 나오지 않는 디자인의 스타일의 빈티지 겨울 니트와 카디건도 방방 뜨며 설렘을 안고 데리고 왔다. 지금까지 아주아주 야무지게 잘 입고 있다. 소위 돈 굳는 상황이 요즘은 왜 이리 보람 있는지. 무튼 난 확실히 변했다.


요즘 내 스스로에게 다짐 아닌 다짐을 한 것 중의 하나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옷들을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어서도 입을 수 있도록 깨끗하게 그리고 잘 다뤄주자.라는 것과 앞으로 가급적 새 옷은 사지 말자.인데, 내 성향상 그리고 지금의 내 삶의 철학과 라이프 스타일상 꽤 잘 지켜질 것이라고 믿는다. 나 역시 옷 정리를 하면서 버리는 옷들을 바라보며 그동안 내가 너무 쉽게 소비를 위한 소비, 소비를 위한 외적 치장을 했었구나하는 자각이 일었다.


잘 되었다 싶은 것이, 워낙에 옷이든 물건이든 옛날 감성의 오래된 빈티지 감성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혹은 필요한 옷을 사게 되더라도 빈티지 옷으로 대체하자고 생각하니 더욱이 그러했다. 너무도 쉽게 의식적이지 않게 옷을 위한 소비, 결국엔 버려짐을 위한 소비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결국엔 버려지는 건 쓰레기가 되는 것인데 환경에도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을 이렇게라도 만회하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최근엔 정말 오랜만에 그러니까 내가 대학생이던 때니까 적어도 10년은 훌쩍 되었을 테다. 동대문 밀리오레에서 샀던 걸로 기억하는데 검은색과 베이지 색이 적절히 섞인 무스탕 느낌의 겨울 코트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옷장 속에 오랜 시간 캐캐 묵어 있었다는 건데, 내 마음과 태도가 바뀌자 이제는 그 옷이 너무 빈티지스러우며 독특하며 개성 있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애정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정말 내 물건에 대한 애정도 결국엔 다 내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그렇게 또 깨닫게 됐다. 내가 내 물건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생각까지.


사실 외적으로는 흔히 말하는 청순하다던지 수수하다는 느낌의 예쁨은 찾아보기 꽤 어려운 외모를 가졌다. 대신 얼굴도 피부도 타고난 구릿빛 피부를 가졌고 실제 근육량과는 상관 없이 적어도 겉보이기에는 몸이 탄탄해 보이고 건강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늘 듣는다. 그래서인지 어릴 땐 오히려 얼굴에 맞게 화려하게 입어도 과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게 또 하나의 내 스타일이 되기도 했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위풍당당의 내 모습에도 분명 영향을 끼쳤던 것도 분명했다.


과거의 나를 자주 반추해보다 진짜 내 모습이 아닌 남이 바라보는 내가 나.라는 자만과 환상에 젖어 그것도 깊이 빠져 진짜 나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지난 시절이 있었음을 난 뼈저리게 인정하게 됐다. 그런 나를 인정하고 나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진짜 나. 를 만나고자 하는 일이었다. 난 그렇게 꽤 오랜 시간 진짜 나를 찾아 방황했고 지금은 진짜 나를 만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매 순간 의식하고 깨어있고 사유하고 생각하며 내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


내 일상 내 삶 사소한 일 하나하나 내 물건 하나하나 내 인생, 나아가 인간의 삶과 연관 짓지 않은 것이 없고 그저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만족스럽고 감사하다. 그래서인지 얻어 입는 옷 하나에도 개꿀이라며 기뻐하고 옷가게나 신발가게에는 관심조차 가져지지 않으며 소박하고 수수한 내 모습이 예쁘고 심지어는 아름다워 보인다. 어떨 땐 마치 자연 상태로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나를 아는 이들은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많이들 놀랄 것이다. 살면서 외적으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고백하건대, 매력적이다, 섹시하다, 세련됐다, 도시적이다, 이국적이다.인데, 지금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아주 많이 수수해졌다. 보헤미안 감성처럼 자꾸만 자연과 더욱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돈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으며 함부로 소비하지 않게 됐다. 단순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간소하게 쌈빡하게 가지런하게 정갈하게 살고 싶다는 나의 삶의 태도가 이러한 삶의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틀림없다. 그 이후로 나는 자주 행복감을 느끼고 자주 만족감을 느낀다. 만족하는 삶을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한 삶의 낭만을 알아버렸다.


어릴 적부터 삶에는 낭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돌고 돌아 이제야 내 삶에도 낭만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이마저도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앞으로 살아갈 내 삶에 이런 낭만이 가득하다면 이 얼마나 풍요로운 삶이 될까. 하는 설렘마저 드는 요즘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겉모습이 새롭지 않아도, 명품을 입지 않아도 나는 내가 그 어떤 명품보다도 아름답고 우아하고 아우라가 느껴질 수 있게 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신감은 기가 막히게 갖고 있다. 고로 보풀도 있고 조금은 낡은 오래된 옷을 입어도 내 안이 탄탄하면 절대 초라하지도 기죽지도 않는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새 옷을 사는 일보다 내 몸을 건강하게 라인은 또 아름답게 늘 유지하면 고터의 만원 짜리 옷을 입어도 명품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내 나름의 철학에도 변함이 없다.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낭만을 알아버린 나는, 앞으로 나의 남은 인생에도 이 낭만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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