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정자 클럽" 미국의 투자귀재 워렌버핏이 한 말이다. 모 신문사 취재기자 필기시험에 합격했던 글의 서두였다. 주제는 사회 양극화였고 작문을 썼다.
워렌버핏의 단어 선택은 참으로 탁월했다. 이미 우리의 운명은, 동양적으로 말하자면 팔자는, 정자에서부터 판가름 난다는 얘기다. 대부분은 그렇지만 요즘은 또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워렌버핏의 말에 공감하는 부분이 더 많다.
파리는 노숙자들이 정말 많다. 한발 짝만 떼도 볼 수 있다고 해도 될 정도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복지국가라고 말하는 프랑스에 노숙자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왜. 프랑스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가난한 나라들에서 조차도 길거리에서 이리 쉽게 노숙자들을 보진 못했다.
매일 아침 집 앞에서 마주했던 젊은 노숙인이 있었다. 그는 내가 지나갈 때마다 꼭 눈을 맞추며 봉쥬흐 마담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추운 겨울 아침마다 그와 마주치는 날이면 이 추운 날 이 자리에서 잔 건가. 이렇게 추운데.라는 마음이 앞섰다.
그는 단 한 번도 미소 짓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그를 알게 된 후부터 빵과 비스킷을 사서 건넸다. 나라면, 내가 지금 그였다면 어땠을까. 난 그처럼 사람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미소 지을 수 있었을까. 빵 한 조각이 없어 배고픔에 허덕이는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인데 남에게 먼저 따뜻한 인사 한마디 건넬 수 있는 그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잘은 모르지만 그 순간 내가 그보다 나은 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매일 자신의 삶과 정면으로 사투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이리 많이 존재하는데 이들보다 가진게 많은 난, 무엇이 그리 우울하며 때로는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는 건지. 그의 모습에 날 비추어 보니 혼란스러웠다. 부끄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에게 삶은 생존이다. 그에게 삶은 하루 살이고 사투다. 죽음에 내몰린 최악의 상황임에도 그가 구걸을 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그를 살고자 하게 하는 걸까.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 삶은 비참하다.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무엇이 그를, 그들을 차가운 길바닥 위로 내몬 걸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연민의 감정이 어쩌면 오만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권리로 어떤 자격으로 그들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 단 말인가.
이 세상엔 흔히 우리가 말하는 평범함조차 없이 살아가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 그들이 불행할 거라는 것. 그들에겐 희망이 없을 거라는 그 생각이 바로 오만함이 아닐까.생각했다.
사람은 도대체 왜 사는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참 어렵다. 인생 너무 그렇게 붙잡아가며 더 많이 가지려고 집착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 니체도 장자도 노자도 인간에 대해 깊이 고민했고 그 깨달음과 지혜를 남긴 것을 보면 인간이 곧 삶이고 곧 삶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행운의 정자클럽.엔 선택권이 없다. 운빨이 기가 막힐 뿐. 우리는 안다. 결국 그 행운도 잠시 앉았다 갈 뿐 결국 인간의 죽음 뒤 우리 모두는 다시 평등해 짐을.
더 많이 가졌다고 우쭐해하지도 덜 가졌다고 슬퍼하지도 말자.고 이 생각 끝 여운과 잔상이 한동안 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