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먼 곳으로 혹은 아주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비우기. 그리고 정리다. 불필요한 물건은 없는지. 내 마음에 더 이상 설레지 않은 물건은 없는지. 내 마음마저 흐트러지게 만들만한 느낌의 물건은 없는지 천천히 둘러보고 살핀 후 미련 없이 과감하게 버리거나 정리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포함된다. 이 옷을 입었을 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거나 기분 좋지 않은 일을 겪었다든지. 이 물건을 들인 후 괜히 느낌적으로다가 기분적으로다가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든다든지. 하는 것들... 요즘 같으면 내 집구석구석을 요리조리 살피기 바쁘다. 이야기 즉슨, 내 마음에서 자꾸만 무언가를 정리하고 싶고 비우고 싶어한다는 말과 같다.
저녁을 먹은 후 싱크대에 그릇을 내려놓다 차제에 곧장 부엌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그릇과 접시 하나에도 내 취향과 나만의 의미와 스토리를 담는 편이라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릇 가지들에 대한 애정이 참 깊다. 사용하지 않은 그릇들은 전혀 없으며 이 그릇들에게 조차 나는 고루 사랑을 나눠주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꼭 필요한 가짓수만 남게 되었으며 내 눈에는 참 예쁜, 내 마음에 쏘옥 드는 취향저격의 그릇들만 10개 안팎으로 부엌 찬장을 채우고 있다.
이마저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부엌살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의미와 소중함과 가치를 잃어버리기 쉽다는 생각이다. 이런 태도는 내가 나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음식을 담아내어 내 입 안에 넣어지는 그 순간까지 나를 위한 정성과 사랑과 낭만을 만끽할 수 있게 한다. 온통 내 취향의 식기들이기에 우드 테이블 위에 그릇이 놓여지는 그 소리조차 나는 정겹다.
그릇을 아끼는 것과는 그 결이 다른데, 자칫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내 부엌살림들을 집착 없이,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내 마음 가는 대로 내 손이 가는 대로 내 몸이 반응하는 대로 자연스레 휘뚜루마뚜루 고루 사용해준다.
한눈에 보아도 그릇 개수가 세어지긴 하지만, 그릇들을 마른 거즈로 닦으면서 세보았다. 레트로 빈티지 접시 2개, 취향저격의 made in japan 그릇 3개, made in korea 행남자기 접시 2개, 레트로 오각형 그릇 1개, 언니가 손수 빚어 구운 도자기 크기가 각각 다른 접시와 컵 각각 3개. 자잘한 소스 그릇을 제외하면 굵직굵직한 것은 총 14개라는 셈이 나왔다.
정리는 자주자주 하는 편이라 딱히 정리할 것은 없었고 그릇들을 다시 가지런하게 보기 좋게 배치했는데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부엌살림을 바라보고 있자면 뭐랄까. 내 마음도 이와 같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는 듯한 동질감을 느낀다. 가스레인지와 그 주변, 싱크대까지 말끔하게 닦고 청소하고 나면, 지금 당장이라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곧 운수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생각은 분명 나의 이 행위에 한 껏 힘을 실어 준다는 생각이다.
아무렴 어떠한가. 내 생각과 마음이 그러면 현실이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믿고 있고 아니 다한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내 기분과 에너지가 밝아졌고 나아졌으면 그만이다. 충분하다. 갖은 양념통과 소스통도 하나하나 눈 맞추며 닦아주었고 냉장고 안까지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기분이 한층 살뜰해지고 넉넉해진 차제에, 간식이 당겼고 냉동실에서 얼려놓은 요거트를 꺼냈다. 요구르트를 냉동실에 넣어놓은 후 아이스크림처럼 스푼으로 떠먹는 것. 내가 즐겨 찾는 디저트 혹은 간식이다. 한 스푼 입에 넣으면서는, 아. 맛있어. 이런 게 행복 아니겠는가. 하는 나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거나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 나의 독백은 손발이 오그라들리만치 혀끝이 짧아진다. 아주 귀여우면서도 반가운 증상이라 하겠다.
후. 부엌 청소에 내가 좋아하는 요거트 아이스크림까지. 이 하나에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고 느낀다. 행복이란 별 거 아니다. 그저 내가 순간순간 느끼는 달콤한 기분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 행복이 별 거 겠으며 멀리 있겠는가. 싶다. 그렇게 본다면 난, 행복한 사람 맞다.
서른 중반에 접어들면서 온전하게, 오롯이 내 취향대로 살아가고 있어서 그런지. 나는 내가 하면 기분 좋아지는 것들,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게 되고 또 행동하게 된다. 부엌 정리를 자주 하는 것 역시 내가 추구하는 단출하고 소소하고 수수하고 소박하지만 밝고 찬란한 삶의 일부분이다.
부엌을 정리하는 일. 은 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자 내 안의 나를 만나 대화하는 일이자 나를 보듬고 달래고 안아주는 일이자 나를 돌아보며 삶의 고삐를 다잡는 일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물건들을 버리거나 정리하는 일, 내 주변을 깔끔하게 단출하게 정리하는 일은 내 안에 사특한 생각과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내 나름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바나나를 식초와 설탕에 절여 유리병에 가득 채워 냉장고에 넣어놨는데 내일 아침엔 플레인 요거트에 절인 바나나에 블루베리를 넣어 먹어야겠다. 담을 그릇은, 요구르트 볼 사이즈의 둥글고 속은 움푹한 빨간 앵두가 2개 그려진 그릇에 담기로 한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역시나 내 기분 탓이겠지. 이래서 내 취향 껏 산다는 건 곧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나의 깨달음이란 뭐든 새롭거나 창조되는 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본래 있었던 것인데 내가 지금 깨달았을 뿐.이라는 생각은 나와 내 삶을 더 깨어있게 하고 명료하게 하고 선명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든다.
부엌 살림살이를 자주 비우고 정리하고 닦고 청소하는 나... 이 조차도 나는 그냥. 하는 법이 없다.
말끔해진 살뜰해진 내 부엌살림을 가까이서도 한 번, 멀리서도 한 번 쓰윽 보고 있자니, 다소 먹구름이었던 내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맑게 개었으면 이미 그걸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