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토요일 이른 아침, 집밖을 나오니 하늘에선 송글송글한 몽글몽글한 눈이 뽀송뽀송하게 내리고 있다. 눈 하나에 기분이 째 질일인가.싶지만 역시나 그러하다는 생각이다. 흩날리는 솜사탕같은 녀석들과 함께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이 내리기도 하고, 작년 딱 이맘때의 내가 오버랩 되고야 말았는데, 문득 변한 게 있을까.싶었다. 분명 일년 전보다는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왔고 마음.이라는 것도 이제는 제법 잘 다스리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정말일까. 의뭉스럽게도 이런 저런 생각들이 코끝을 스쳤다.
그러다 이내, 하얗게 눈 덮인 창밖 너머의 풍경들을 보며 "무튼 2023년이 기대되는 걸. 어떤 일들이 어떤 시간들이 내 앞에 펼쳐질까. 확실한 건 초아야, 이제는 정말 변해야 해."라는 속삭임도 잊지 않는다.
한달 전쯤인가. 팔로우하는 피드 스토리에(사실 SNS와는 거리가 먼 편인데, 내 마음에 쏙 드는 감성과 글들이 잔뜩인 인스파 피드들을 보기 위한 아찔한 용도로 사용 중이다) 질문이 있었다. "실패에 대한 정의" 즉, "여러분이 생각하는 실패란?"
일초의 망설임없이 내 대답은 이러했다. "내 안의 참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에고가 만들어낸 걱정 불안 우울이라는 허상을 침잠하게 내버려 두는 일."
밝기만 했던 아니 밝을 줄만 알았던 이십대를 지나 서른이 넘은 직후 내 스스로 내린 선택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채 지리하게 내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아등바등했던 시절을 지나 서른 중반이 되고 나서야, 이제서야 깨닫게 된 나만의 실패에 대한 정의.였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성공 내지 실패에 대한 정의는 다 다를진데, 내가 내린 실패에 대한 정의대로라면야, 그렇다. 나는 완벽하게 실패한 사람이다. 완벽하게 실패한 여자다. 우울에 휩싸여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나.라는 존재를 잃어렸던 시절도 있었고 그런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내 자신을 스스로 처절하게 매몰차게 싸늘하게 차갑게 버린, 방관했던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기나긴 여름 장마처럼 지리했고 또 지리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시절이 내게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른 살부터 지금까지이니 어언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렇게 우울과 불안을 반복했다. 한 번도 그러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고백하건대, 나의 서른은, 30s는 외로웠고 괴로웠고 힘겨웠다.
이제는 그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깨달음과 지혜가 나름 켭켭히 쌓여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내가 되었다는 것. 나만의 철학과 기운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으로 내 스스로를 위로하며 안아주며 달래며 살뜰히 보살펴가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사실 지금도 여전히 우울과 불안을 반복하며 사는 건 마찬가지인데, 내 삶의 주관과 철학을 가지고 단단하게 삶의 고삐를 하루하루 바짝 조이며 살다보니 이곳저곳 튼튼한 내.가 되었다는 것. 분명 이전과는 다른 나다. 쉽게 상처 받지 않는 내.가 되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가장 먼저 챙기고 돌보는 내가 되어, 대견스러울리만치 내가 나에게 고마울 때가 많다.
우울, 불안, 쓸데없는 걱정 등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들이 나를 소위 잡아먹도록 갉아먹도록 내버려두는 일을 태연하게도 자행했던 나를 반성한다. 그런 나를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내린 정의대로라면 나는 완벽하게 실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지난 6년 간 내 삶은 분명 실패한 삶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나는 선명해졌고 내 삶도 선명해졌다.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지금 당장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실패의 아수라장에서 회오리 속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순간, 인간은 끝없이 좌절 혹은 절망하기 보다는 결국 이제는 올라가는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고 소스라치게 온갖 발악과 고통의 과정 끝에 끄끝내 일어서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그렇게 내 스스로의 밑바닥을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나의 지리한, 징글징글했던 우울이 결핍이 내게는 축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내게 주어진 그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었고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는 삶을 살게 되었고 내가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듯 세상 모든 사람들 역시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러다보니 타인에게도 좀 더 살가운, 지극히 인간적인, 좀 더 상냥한 내가 되었다.
눈이 아름답게 수놓는 풍경 속, 토요일 이 아침에 내 앞에 펼쳐진 현실 풍경과는 다르게 조금은 쌩뚱맞게 실패한 여자.를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니. 아무렴 어떤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처럼, 글도 물흐르듯 자연스레 마음가는대로 생각나는 대로 내 자연스런 의심의 흐름대로 쓰면 그만인 것을.
실패한 사람. 실패한 여자라는 사실이 마치 훈장처럼 느껴지는 요즘. 실패해보아서 또 그걸 극복하고 있는 나라서 또 그런 나라서. 요즘은 그저 미련하기도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도 빵빵한 양볼을 살짝 비틀어 꼬집으며 귀여운 녀석이라고 넘길때가 많다. 여전히 실수투성이여도 크고 작은 실수에도 참으로 너그러운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
나라는 사람의 성장에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눈 내리는 토요일 오후. 나는 어김없이 나만의 작은 낭만 하나를 선물하러 발걸음을 힘차게 옮긴다. 오늘은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내게 선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