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 마음을 롤러코스터처럼 들었다 놓았다 쿵쾅쿵쾅 음 하아... 하게, 왕창 설레게 하는 건 하얀 눈이다. 꽤 쌓였다. 집을 나서는 길에 하얀 설탕처럼 쌓인 눈을 투벅투벅 밟아보았다.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찾아오는 순간이지만, 늘 새롭고 또 새롭다.
모두가, 온 세상이 고요하게 잠든 새벽녘에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바라보는 걸 참 좋아하는데 그럴 때면 뭐랄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때로는 유한한 인생에서 이 겨울의 눈을 끊임없이 가능하다면 영원히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날은 털 모자에, 비니를 딱 써주고 싶은 딱 그런 날인데, 내 이목구비 탓인지 최근 한 단발머리에는 영 아니올시다.가 되었다. 일하러 가는 시간보다 두 시간정도 일찍 나왔다. 자주 가는 카페에 들러 라테 한 잔 마시고 정신도 차릴 겸, 어제 도서관에서 빌린 분더카머,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를 빌려왔는데 즉흥적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그 책들을 읽을 설렘을 곧장 실현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렇게 카페에 도착했다.
최근 수시로 우울감이 내 몸과 마음을 습격했는데 이럴 때일 수록 무조건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한 전문가의 이야기에 동의했다. 희한하리만치 신비로울만치 우울한 상태일 때 어떻게해서라도 집 밖을 나온다던지, 집에서 어디로 어디로 몸의 공간을 바꿔놓으면 일시적일지라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고 사라지곤 한다. 전문가 왈, 과거에 대한 반추.가 우울증의 가장 강력한 원인이라는데 여기에도 소스라치게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카페에 도착해 커피 향을 맡으니 좀 살 것 같다. 텀블러 할인까지 받으니 2,900원의 행복이랄까. 무튼 내 마음은 오늘 내린 하얀 눈처럼 소복소복하게 가라앉았고 고요해졌다. 파리의 겨울을 조금은 춥게 혹독하게 보내서인지 이맘때 쯤이면 파리의 겨울이 생각난다. 이제는 자동반사적으로 된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스 큐브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내 몸과 마음이 유독 춥던 시절, 그때가 사무칠 정도는 아니나 바로 그 직전 만치 그리울 때가 있다.
추적추적 진눈깨비가 자주 내리고 비가 많이 내리던 파리의 겨울, 눈 내리는 날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파리의 겨울은 내게 소녀같은 감성을 쉽사리 내주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파리에 갈 날이 오겠지. 그때의 내 기분은 어떤 감정일까.
소위 목폴라를 조금은 답답해 하는 성미라 잘 입지 않은 편인데 혹시 몰라 딱 한 벌 남겨두었던 짙은 네이비 목티를 오늘은 입어야만 했다. 추위에 참으로 취약한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금도 내 손은 수시로 목을 왔다갔다를 반복한다. 제법 아니 이제 진짜 겨울이 된 것 같다. 겨울도 겨울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제에, 즉 추우려면 확실하게 추워서 겨울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는데 기어코 추운 겨울이 오고야 말았다. 반갑다.
참, 흰색 기모 바지도 꺼내 입었다. 두꺼운 겨울용 흰색 기모 바지인데, 이제는 멋보다도 내 자신이 편안한지, 이 겨울에 날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 건지, 그 물건의 용도와 쓸모가 중요하게 됐다. 편한 운동화는 물론이다.
눈 하나에 기분이 이리도 설레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내 정신도 맑아지고 파릇파릇해질 줄이야. 줄이야.가 아니라 그러니까 눈이다.라는 생각이다. 비를 유독 반기는 취향인데 눈 또한 안 반길리가 있나. 그러고보면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라면 다 사랑하는 것 같다. 땅에 있는 나와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무언가가 만나는 기가막힌 기운이 나는 그리도 좋달까.
행복도 사소한 우연으로 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오늘의 나는, 두 방울 반을 넣은 라테 한 잔에, 목폴라에, 기모바지에, 책 2권에, 하야디 하얀 눈 하나에 찐으로 행복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