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푹 잘 잔 모양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몸이 가뿐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면서 오늘같이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날이면 유독 열정적이게 당기는 것이 있다. 카페 콘 레체와 카페 라테다. 빵과 라테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해 와 아침을 먹었다.
글루미 벗 바람이 부는 오늘 같은 날엔 나는 어김없이 성시경의 노래들을 재생한다. 희재를 첫 번째 트랙으로 선곡했다. 라테 한 잔과 빵 몇 조각, 내 마음을 울리는 감미로운 노래, 어두운 조명 하나, 이케아 소파의 쿠션감,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나만의 작은 일상이자 루틴이자 낭만이기도 하다.
낭만이 별거 던가. 낭만은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기분과 내 태도에 달려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게 된 나는 내 일상 곳곳이 낭만이 아닌 곳이 없다는 생각이다. 차가운 계절이 좋아진 지가 조금 되었는데, 지금의 나는 차가운 공기와 온도와 칼바람에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어떨 땐 그 매서운 쌀쌀맞은 공기가 내 뺨을 털썩 때리며, 날 깨어있게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며칠 째 내 스스로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데 이 또한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더는 나 자신이 게으르다고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자책하거나 야단하지 않는다. 지금 내 몸은 쉬고 싶구나. 그래 네 몸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면 잠시 쉬어가자. 하곤 무심하게 넘긴다.
라테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면서도, 그 양이 금방 줄어들까. 야금야금 조금씩 조금씩 스틱을 빨아 당기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카페 콘 레체는 스페인 여행 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마셨던 커피인데 겨울이면 카페 콘 레체가 그렇게 그립다. 카페 콘 레체도 카페 콘 레체지만 이른 아침 새벽 공기, 차가운 온도, 낡은 그러나 너무도 낭만적이기만 했던 그 카페의 분위기와 온도, 사람들이 그리운 걸지도 모르겠다.
시럽을 달달하게 넣은 이 라테 한 잔에 카페 콘 레체를 대신한다. 따뜻한 카페 라테 한 잔에 이리도 잔잔한 행복감을 느낄 일인가. 느낄 일이다라는 생각이다. 커피도 갓 나온 뜨거운 커피보다는 적당히 식은 뜨뜻하다. 적당히 따스운 온도에서 마신다. 그래서 항상 5분 정도 텀을 두고 마시는 편이다.
뜨거운 커피가 따뜻한 커피가 되기를 기다리는 그 몇 분 동안 나는 생각한다. 그래 어쩌면 내 인생에도 내 삶에도 이런 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그 시간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여유를 갖자고. 말이다. 별 거 아닌 것에,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에도, 일에도 요즘의 나는 그렇게 통찰하며 산다. 마치 통찰이 습관인 사람처럼. 깨어있고 의식하며 산다는 걸 내 스스로가 찐으로 강렬하게 느낀다고 할까.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나니, 준비기간도 짧아졌다. 머리를 말리는데 들어가는 시간도 확연히 줄었으며 내 마음까지 조금은 더 시원시원해졌달까. 굵은 레자 딱 핀, 빈티지 딱 핀을 꽂아 촌스러움을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제 일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한 명은 말투나 목소리는 부드러우신데 쎈언니 같다고 했고 한 명은 배우 같다고 했고 한 명은 무언가 신비스럽게 보인다고 했다. 나는 지레짐작 칭찬으로 받아들이고선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내가 칭찬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칭찬이 된 셈이다).
다행인 건, 말투와 목소리가 부드럽다고 하니 그러면 되었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나는, 말이 많은 나보다, 때로는 침묵하는 내가 더 편하며 목소리는 차분하고 무심하게, 말투는 상냥한 내가 좋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상냥함이 곧 아름다움과 같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어제도 일하러 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 시럽 2번 혹은 2번 반을 넣어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마시면서 생각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용감해지자, 도전해보자, 시작해보자, 한 번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등등 강렬한 다짐을 하기 일쑤인데, 며칠 째 제자리인 나를 보며 조금 더 시간을 주기로 했다. 아직 네 몸이 네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지 뭐. 조금 더 기다리자. 조금 더 기다려줄게. 하고선 카페를 나섰다.
구수한 카페 라테 한 잔에도 나는 이렇게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지금껏 내가 경험한 것들이, 그로 인한 삶의 통찰이,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20대의 나, 삼십 대 초반의 내가 알고 있었더라면...이라는 생각이 아주 가끔 날 잠식하기도 그 또한 이미 지나 간 걸, 이미 아닌 걸 어쩌겠는가. 하는 내가 되었다. 물론 그랬다면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본래부터 확실한 것 없었던 것처럼, 나는 지금을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러한 생각들을 밀어낸다.
테이크 아웃해 온 카페 라테가 글을 쓰는 동안 알맞게 식었다. 무게감으로 보아 삼분의 일 정도 남은 모양인데, 라테 한 잔을 다 먹어가면 갈수록 그 아쉬움 때문인지 그 맛은 더 깊어지고 맛있어지고 구수해진다. 라테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서야 나는 뚜껑을 닫는다. 라테 한잔에 행복해졌으니, 오늘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낭만 한 스푼, 한 스푼이 더해져 내 하루가 되고 내 일상이 되고 내 삶이 된다. 는 생각은 늘 날 위로하고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