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통장을 발급하다

by miu

아침 일찍 일이 있어 집을 나섰다. 뿌연 안개가 자욱하다. 이른 시간이라 길가엔 인적도 드물고 날씨도 유난히 을씨년스러워서인지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어느 장면과도 같은 기분에 외딴곳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가는 길에 따뜻한 라테 한 잔으로 오늘 하루 작은 낭만을 내게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마 전 머리를 단발로 자른 이후 그 이유 하나만으로 외출 준비가 더욱이 간소해졌다는 점에서 자르길 잘했다 그러다가도 아마 자르지 않았다면 지금쯤 예쁜 털모자로 나름 괜찮은 스타일링을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짧게 했다.


생각해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은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서 때로는 신중하게 거의 대부분은 즉흥적인 결정과 그에 따른 선택과 결과물들로 하루하루를, 인생을 살아간다는 생각이다. 직관과 직감을 자주 따르고 믿는 편이다.


어제 문득 버스에서 내려서는 횡단보도 너머 보이는 은행에 갔다. 원래 계획되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문득 통장발행이 하고 싶어졌다. 언제부터였던가. 통장정리 및 통장 실물발행을 하지 않았던지가. 웬만하면 앱을 통해서 하는 터라, 은행 지점에 특별히 갈 일도 없게 된 탓이 크다.


어쩌다가라도 은행에 앉아 볼일이라도 볼테면 전직 은행원 출신이라 그런지 그 시절의 나, 분주하게 은행일을 하던 나, 젊디 젊었던 파릇파릇한 한 그루 나무 같았던 내 모습에 잠시 온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무튼 즉흥적으로 방문해서 내가 했던 일은, 비대면으로 발급했던 계좌들의 실물 통장 발행이었다.


웬일인지 아날로그적인 실물 통장이 발급하고 싶어졌고 저축계좌의 경우엔 종종 통장정리가 하고 싶어졌던 이유였다. 찌지직 찌지직 내는 통장정리의 소리도 참 오랜만이었다. 통장 케이스에 가지런히 넣어진 통장을 보고 있자니, 소소한 옛 추억들이 소환되었고 현재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내일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라는 삶의 통찰로까지 이어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라는 물질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가치 사이에서 기가 막힌 균형이라도 찾고 싶었던 거였을까. 즉흥적이었던 통장 발행의 행위 하나로 나는 이날 또 하나의 작은 낭만을 만끽했다. 별거 아닌 행위가 없다는 생각이다. 잠시 느슨해졌던 내 일상에, 내 습관에 고삐를 바짝 조이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과거는 이미 버려진 것이다.라는 부다의 말도 내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이 많은 편인 나는, 내 현재 생활만큼이나, 내 살림만큼이나 내 생각도 단출해지고 싶지만 타고난 것인지 생각만큼은 좀처럼 단출해지지 않는 게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 중반의 나는, 불과 몇 년 전의 나와 비교하면 꽤 많이 단출해지고 단순해졌다.


좀 전에 데일리 백인 화이트&아이보리의 천 에코백에서 책을 들춰내다 어제 발행한 통장 두 개가 보였다. 하나는 핑크색, 하나는 블루. 다소 아날로그적이지만 통장 실물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나는 뭐랄까. 그 마저도 빈티지스럽고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나도 재밌다며 미소 짓고 말았다.


아직 마흔이 되려면 몇 년은 남았으니,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후회 없이(후회가 아예 없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완벽한 후회 없음 보다는 가급적 덜 후회하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재미있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안 될 이유를 찾지 말고 될 이유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한계를 짓지 말고 진짜 너의 한계를 발굴해보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들로 내 하루를 꽉꽉 채우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통장 발행은 한 수였다. 저축통장의 경우 다달이 찍히는 날짜와 금액에 별의별 생각을 하게 했다는 것과 이 것 하나로 내 삶을 통찰하게 했다는 점에서 특히나 그러하다. 빌려 볼 책의 목록과 도서 기호를 미리 메모해두었는데 오후에 도서관에 들러 이 책들을 모두 데려갈 생각을 하니 신이 조금 난 상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내 안에 침잠할 때, 마음이 우울할 때면 곧바로 알아차리고선 책을 읽기 시작하는 나는, 책 읽는 즐거움에, 도서관에 가는 즐거움에, 통장도 아주 오랜만에 발급해보는 재미에, 입김이 호호 절로 불리는 이 겨울 아침에 달달한 라테 한 잔을 선물하는 낭만에, 피곤할 땐 졸릴 땐 버스에서 푹 자버리는 낭만에, 오늘 저녁엔 뭘 먹지 하는 먹는 기쁨에... 등등 수많은 삶의 재미와 즐거움과 낭만으로 내 서른 중반의 삶을 수놓고 있다.


통장 하나에 이럴 일.이냐 싶지만, 나라는 사람은 통장 하나에 이럴 일.하는 사람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내 삶을 요리하고 조절하고 통찰하는 지금의 내가. 나는 무척이나 다행스럽고 깜찍하다.


이러니 내 삶도 안 깜찍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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