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이 없는 편이다. 과거의 나는 꽤 즉흥적이었고 감정적이었고 좋게 말해 호기로웠고 반대로 말해 철이 없었달까. 그래도 그런 성향 탓에 밋밋하기보다는 다채로운 경험들을 하며 살아왔다. 지나온 내 삶에 이런저런 후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그렇지만 이미 지나간 일들을 곱씹어 나를 좀먹지 않도록 애쓰며 산다.
우연히 프랑스 영화 에펠을 보게 됐다. 프랑스어만 들어도, 프랑스 풍경이나 파리의 모습을 보게라도 되면 파리지엔느로 살던 때가 생각나는 건 필연적이다. 잘 알아듣겠는 프랑스어가 나오면 프랑스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볼까. 정말 마음먹고 공부해서 어느 정도 현지인처럼 구사하는 내가 되어 볼까.하지만 먹고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짐짓 언어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센 강을 친구 삼아 비오는 어두 컴컴한 센 강 길을 자주 걷곤 했다. 집에서 가까운 오뗄 드 빌에서 출발해 건너편 오르세 미술관까지 걸었던 나만의 길이 있었는데, 그때의 내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추운 겨울 어느 날, 혼자 터벅터벅 걸으며 양손은 호주머니에 푹 넣은 채로, 두껍고 긴 머플러를 목에 둘둘 꽁꽁 둘러맨 채로, 그렇게 홀로 걷는 게 익숙했고 또 그게 편했고 그게 좋았다. 진지하게는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내 삶을 관조하고 통찰할 수 있게 됐던 때. 그때 말이다. 주말이면 홀로 베르사유로 가는 기차와 버스에 올라 정처 없이 걷던 내가 선명하다. 애도 써봤다. 내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가며, 어떻게 하고 싶니. 어떤 삶을 살고 싶니. 네 마음은 대체 왜 그러는 거니.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니. 앞으로 어떻게 할 거니. 등등 나는 끊임없이 내 안의 나를 수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썼다.
깨닫게 된 건, 그 방황을 이상하게 혹은 어리석게, 안타깝게, 애석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방황을 날 성장하는 시간으로, 어쩌면 내 삶에 꼭 필요한 필연이라고, 우연은 없다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고 괜찮다고.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도 이따금씩, 수시로 찾아오는 방황과 고독에 나는 초연해지게 됐다. 의연함도 갖췄다.
시간이 쏜살같다는 표현이 더욱 와닿는 요즘인데, 이것조차 나이 탓일까. 시간.이 무척이나 귀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날 자책하고 미워하고 다 지난 과거를 붙잡고 후회하느라 흘려버렸다는 생각에 자주 소스라칠 때도 있지만, 이미 지난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도 나였음을, 어리석은 나도 나였음을 인정하자.고 날 안정시킨다.
고독했고 외로웠다. 상처와 상실과 고독과 불안과 우울과 싸우느라 정신이 너덜너덜 찢겨지던 시절, 그 바닥을 가까스로 딛고 일어난 후에 깨달은 한 가지는, 그 누구도 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였다. 부모도 형제도 그 누구도 날 완전하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바로 내 자신을 내 스스로 지키는 일이었다.
누가 날 지켜줄 수 있을까. 내가 날 지키며 용감하게 덤덤하게 담담하게 무심하게 무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요즘 내 마음이 힘들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 감정을 다시 혹은 오래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게 정확하다. 무튼 내가 내 자신으로 살아가면,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면, 나답게 살아가면 그 무엇이 두려울까. 자주 수시로 다짐한다. 누가 날 지켜줄 수 있을까. 날 지켜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이라는 걸.
인생 내 마음대로 되던 적이 있던가. 늘 알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아니었던가. 인생이란 원래 이런 것. 그런 것.이라는 걸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그저 내가 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날 지키고 보호하고 위로하고 안아주고 사랑해주는 일.이 살면서 가장 필요하고 또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누가 날 지켜 줄 수 있을까. 정답은 역시나 내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