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비우고 싶은 날

by miu

어릴 적부터 비가 오는 날을 그리도 반겼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도 기어코 우산을 쓰지 않고 옷을 다 젖게 만드는 말괄량이 고집쟁이 어린이. 지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리 반갑고 또 반갑다. 쫄딱 맞은 채로 천변을 냅다 뛰기도 한다. 그 기분은 말로 설명하지 못할 만큼, 청량하다. 그래서 난,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 비가 내려도, 우산이 없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외려 으레 자연스럽다. 맞고 가야겠네?. 난 늘 이런 식이다.


지난달 어느 저녁, 퇴근 후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집까지 비를 쫄딱 맞으며 꽤 빠른 속도로 달렸다. 마음이 울쩍했음이 분명한데, 무조건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다 오른쪽 옆을 보면 가로등 아래 벤치, 다소 거친 바람과 함께 흘러가는 한강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내리는 빗방울이 내 뺨을 때리는 듯했고, 나는 마치 날아오는 화살을 온몸으로 맞는 전사처럼, 거센 빗방울은 내 얼굴과 온몸을 적셨다.


어느덧 잡념은 사라지고 이것이 대체 빗방울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그것조차 구분할 겨를 없이 가슴의 뻥뚤림과 환희를 느꼈다. 나는 그 왠지 모를 환희에 눈물을 쏟아냈고 주르륵주르륵 나는 그렇게 흐르는 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감정과 기분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새로움이었고 벅참이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하더라도 고독, 우울, 쓸쓸함으로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나는 금세 사라지고 생뚱맞게도 왠지 모를 환희와 벅찬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곧 그 감정이 무엇이었을까.를 바로 알아차리게 되었는데, 빗방울 한 방울 한 방울이 내 이마, 코, 볼, 입술, 한 곳 한 곳에 뚝뚝 떨어지면서 내 피부에 촉촉하게 닿을 때, 그 촉감이 내가 살아있구나.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다는 것과 이렇게 자연과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내 자신이. 내 삶이.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 이유였다.


나는 또 깨닫게 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날, 비를 맞으며 한없이 달리던 어느 저녁 그때의 기분과 감정과 내 오감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름답고 눈부셨다. 비가 내리는 주말이어서 그런지 문득 그때의 기억이 났다.


비 오는 날이면 나는 말랑말랑하다. 내 마음은 말랑말랑한 마시멜로와 꼭 닮았다. 여유 있어지고 자연스레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티타임과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청소와 빨래를 한다.


이런 날이면 나는 자꾸만 비우고 싶어 진다. 필요 없는 물건들도 정리하고 비우고 싶고 내 옷가지들, 물건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기 시작한다. 짐이 정말 없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있는 짐도 더 비우고 싶고 사는데도 크게 불편한 게 없다.


비 오고 난 뒤, 더욱 쌀쌀해진 날씨를 보니 겨울 옷을 꺼내고 옷 정리를 쏴악 한 번 할 때다 싶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겨울 옷 정리 및 가뜩이나 없는 내 짐을 더 줄이고자 정리를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가방도 늘 메고 다니는 것만 메고 다니기 때문에 몇 개 남아있는 핸드백과 숄더백도 짐처럼 느껴지고 그 가짓수만큼이나 내 삶의 루틴도 다소 어지러워지는 듯해서 헤지기도 한 빈티지 가방들이기도 해서 과감하게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잡다한 가방들은 비웠고 지금 내게 남은 건, 아이보리색의 에코백(나의 데일리백이다), 남대문에서 산 검은색 가방 하나, 검은색 나이키 백팩 하나, 크로스백 하나다. 딱 필요한 것만 남기는 것. 과감하게 비우고 나면 또 다른 자유를 느낄 수 있다. 무튼 가방은 요렇게 마무리했다.


다음은 겨울 외투 차례. 나는 언제부터인가 겨울 외투는 실용성만을 생각하게 됐고 겨울 코트를 안 입은 지가 7-8년은 된 듯하다. 역시 묵은, 잡다한, 입지 않을, 설레지 않는, 외투들은 다 버렸고 내게 남은 건, 털 점퍼 하나와 후리스, 오래전 엄마가 백화점에서 사주셨던 아이보리 코트, 넥 워머. 딱 이렇게만 남겼다. 비우고 나니 내 마음은 왜 이리도 깃털처럼 가벼운지. 상의도 맨투맨 2개, 가디건 2개만 남기고 다 비웠다. 아주 잘했다.


나는 가뜩이나 뭘 채우지 않는 살림을 생각보다 꽤 자주 들여다보고 냅다 비우고 만다. 내가 자주 쓰는 물건, 애정 하는 물건, 내 취향의 물건들 외에는 아주 얄짤없고 고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고 비우고 나면, 정리된 살림살이처럼 내 삶도 내 일상도 내 일도 그렇게 멀끔해지고 깔끔해지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콤팩트하게 남은 것 같은 것은 물론 왠지 모를 기대감과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은, 곧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놀랍게도 실제 내 삶도 그와 같아진다.


비 오는 날엔 전과 막걸리가 생각난다.지만 내게 비 오는 날은 정리가 하고 싶은, 내 살림살이를 쏴악 비우고 싶은, 나름 특별한 날이다. 어느 날이건 의미 없는 날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하루는 정말이지 어느 하루도 똑같은 하루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내 마음에 따라 나의 평범한 하루도 특별한, 의미 있는 하루가 된다.는 것도 끌리셰하지만 다시 한번 내 마음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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