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막셰 식료품관을 드나드는 일이 취미였고 그곳은 언제나 날 설레게 하는 장소였다. 잼 포장 하나도 어쩜 그리 미적일까. 지극히 파리스럽달까. 요리하고 담아내고 도시락을 예쁘게 싸는 일을 즐거워했던 나로서는 그곳은, 내 미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보통 오후 2시쯤 가면 한산했다. 버터도 이거 다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버터없이는 요리할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요리할 때 버터를 듬뿍 넣는 편인데, 나는 요즘 부쩍 사진을 보다가 그 기억을 소환해 추억하고 그 추억을 통해 내 삶을 관찰하고 있다. 꽤 괜찮은 현상인 것 같다. 자연스러울리만치 떨어진 낙엽을 살짝 밟다가,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설거지를 하다, 빨래를 하다, 커피를 끓이다, 지난 일기를 읽어 내려가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상황과 것들이 온통 날 깨어있게 하고 의식하게 있게 하고 알아차리게 하는 것 투성이다.
일주일 전, 내 나름의 결단이 있었다. 돈보다도, 무언가 도시에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내재되어 있는 화려함과 세련됨 또 그래서 누릴 수 있던 것들에 없어도 괜찮다.는 선언과 함께 그것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지금보다는 조금 덜 벌더라도 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고 내가 하면 기분 좋아지는 것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내 시간을 내 스스로가 컨트롤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나는 선택했다.
결정 끝 내가 내게 한 말은 이랬다. "그래, 일상의 행복과 낭만이 있는 곳을 가자. 다른 외부적 조건들과 상관없이 그저 네 마음이 가는 곳으로 네 마음이 편안하다면 그곳이 바로 네가 있을 곳인지도 몰라." 살다 보면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어디에서건 내가 내 삶에 만족하고 충실하다 보면 또 다른 기회라는 뜻밖의 통 큰 선물이 언제 찾아올지 누가 알아. 지금 내 마음의 상태다.
이삿짐을 싸다 말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고선 대뜸 제목에 나를 설명하지 않을 이유.를 썼다. 그러고선 이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내 마음을 읽어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나를 설명하지 않을 이유라... 내 설명은 이렇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나.를 꼭 빠지지 않고 설명하려 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그것의 무쓸모를 느끼게 되었고 과거의 나.는 이제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굳이.
마음이 무너져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도저히 일어나지지 않았던 꼬꾸라지기 바빴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이미 지나가버린 조금은 남부럽지 않았던 나.의 모습에 대한 후회와 집착이 원인이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산다는 것만큼 안타까운 것은 없다.고 과거에 대한 후회와 집착이 내 몸과 마음을 좀먹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지금은 뼈저리게 알고 있다.
오늘 문득 결심이 섰다. "이제 더는 굳이 나를 설명하고 싶지 않아. 그러고 싶지 않아. 말도 줄이고 싶고 그저 덤덤하게 살고 싶어." 과거의 나도 나였고 몸조차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방황했던 나도 나였고 순간순간 추억되는 그 시절의 나도 나였고 지금의 나도 나다. 그치만 이제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현재의 나.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자. 다 잊자. 이 다짐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다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고 내게 주어진 내적 고통을 감내하며 천천히 조금씩 그렇게 과거의 나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제는 가령 저 어디에 다녔었어요. 어디 출신이에요. 등등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런 효용을 느끼지 못한다. 그 효용이란 내 스스로가 가진 가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는 것을 안타깝게도 너무도 늦은 나이에 깨닫게 되었지만 그런 나도 나라고.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그 얼마나 다행이냐고. 미소 짓고 만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고통이 그 종류가 어떤 것이라 한들 감내해야 할 것은 감내해야 한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 고통은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세계로 나를 안내한다. 그런 경험들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내게 엄청난 자산과 소재들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나는 이제 나를 설명하지 않을 거다. 설명하고 싶지 않다. 지금 내겐 지금의 나.가 있을 뿐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보다는 나는, 왜 이곳에서 사는지. 왜 이 일을 하는지. 기분은 안녕한지. 그런 것들이 훨씬 가치 있고 의미 있고 날 파닥파닥 살게 한다.
말만 그러지 말고, 글로만 적지 말고 정말 그렇게 살아보는 거야 알겠지?... 이실직고하면 가끔은 내 글과는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방황하는 내 마음을 붙잡느라 혼이 날 때가 많다. 무튼 나는 이제, 나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 사람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굳이 멋지고 싶어서 나를 설명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단단할 수 있다면 괜찮다.는 의미이다.
사실 사는데 뭐 그리 많은 설명이 필요한가. 그저 이 세상에 나를 내맡겨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