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꿀꿀해도 밥은 들어간다. 그럴 때면 이런다. "이 상황에 이 기분에도 배가 고픈 걸 보니, 허기진 걸 보니, 어쩌면 그리 심각한 게 아닐지도. 살만하다는 증거겠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부엌은 작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은 부엌이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작아서, 단출해서 아기자기해서 코지해서 귀엽다. 나만의 작은 부엌은 내겐 낭만 그 자체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먹구름처럼 한꺼번에 밀려올 때, 나는 부엌으로 향한다.
냉장고를 활짝 열어젖히고 냉장고 안을 탈탈 정리하는가 하면,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재료들을 꺼내 사부작사부작 뚝딱뚝딱 아스락 아스락 바스락바스락 깎고 썰고 볶고 찌고 삶고 말고... 정신없이 부지런히 내 온 에너지를 부엌이라는 그 공간에 투영한다.
나는 수프를 좋아한다. 묽은 것보다는 진한 콩국물처럼 꾸덕한 질퍽한 짙은 맛을 내는 수프를 선호하고 또 아주 맛깔나게 잘 만든다.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요리 중 하나도 수프다. 그중에서도 당근 수프. 기가 막히다.
수프 레시피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각자 자기만의 레시피를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수프가 아닌가 싶다. 당근 수프, 호박 수프, 양송이 수프... 재료만 다를 뿐 나의 수프 레시피는 하나같이 같다. 그럼에도 각각의 수프 맛은 늘 환상적이라는 것.
가끔 수프를 휘저을 때면 마치 마법수프를 만드는 마녀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데, 그런 상상마저 재미있다. 단순하게 살자.고 늘 다짐하면서도 가끔은 참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내 마음과 내 삶을 보자면 어쩌면 내 삶도 간단한 것 같지만 만드는 이의 정성과 사랑과 배려와 여유가 들어가지 않으면 전혀 다른 맛을 내는 수프처럼, 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끝엔 환상적인 맛을 맛볼 수 있다는 설렘과 기다림과 함께.
낯선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서인지 하루에도 내 마음이 변화무쌍한 변덕스러운 날씨로 변한다. 오늘 역시 그러한 날인데, 오늘은 유독 당근 수프가 당긴다. 그래서 오늘 브런치로 당근 수프를 만들어 먹기로 한다.
당근의 매력을 나는, 당근 수프를 만들어 먹으면서부터 알게 되었는데, 완성된 당근 수프 맛은 이것이 진짜 정녕 당근으로 만든 수프인지 말하지 않으면 전혀 모를 비주얼과 맛을 낸다. 특히나 색은 아주 깨끗하고 맑은 샛노랗이며 맛은 호박 수프에 가까울 정도로 그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있다. 내가 당근 수프를 좋아하는 이유다.
원재료의 색과는 전혀 다른 색이 되어버리는 마법을 가진 당근 수프. 참 매력적이다. 내 꿀꿀한 기분을 당근 수프를 만들며 날려본다. 별 건 없지만 맛은 환상적인 나만의 당근 수프 레시피를 소개하자면, 이러한데 참, 요리할 때 원체 계량과는 거리가 먼 생활 요리인이라 대충, 조금만, 살짝, 적당히, 고정도, 요정도로 설명된다. 계량에 취약하다.
마음을 정열하고 나만의 수프 그릇에 살포시 당근 수프를 담아낸다. 파슬리를 살짝 뿌리고 바짝 구운 베이컨 조각을 그 위에 뿌려준다. 빵 중에서도 사우어 빵을 좋아하는데 사우어 빵이 다 떨어진 날엔 코스트코에서 파는 호밀빵으로 대체한다. 사우어, 호밀빵, 치아바타, 바게뜨, 어느 빵과 함께 내놓아도 그 본연의 맛은 늘 한결같다.
당근 수프 하나에 이렇게 온 에너지를 담을 일이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내 일상이고 내가 내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말하고 싶다. 당근 수프를 만드는 과정 하나에 내 마음은 이미 완성된 당근 수프 빛깔처럼, 샛노랗게 맑게 물들었고 꿀꿀했던 내 기분은 다시 낄낄 껄껄해졌다.
기분이 잠시 가출을 했다면,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불청객이 잠시 문을 두들겼다면, 그럴 땐 간단한 것일지라도 나를 위한 정성 어린 요리로 그들을 대접해보는 게 어떨까. 나의 이런 호의에 그들은 쉬이 물러갈 때가 많다.
오늘, 나의 요 당근 수프 한 스푼에 나는 또 한 번 잘 이겨내 보자고 극복해보자고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나를 진정시켰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걸 보니, 수프의 계절이 왔구나.싶다. 그러므로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씨에 당근 수프를 만든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요리할 때 행복한 나는, 이참에 내 요리 레시피를 내 글과 함께 적어 내려가 볼까. 하는 마음이 순간 일었다. 무튼 당근 수프 한 스푼에 나는 행복해하고 감사해한다. 내 일상 그 어느 것 하나 내게 깨달음과 감사함을 느끼게 해주지 않는 것이 없구나. 글을 쓰며 나는 또 한 번 이렇게 내 삶은 아름답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