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계절은

by miu

꽃을 선물 받았다. 꽃다발을 받아 본 지가 꽤 오랜만인 것 같은데 꽃다발 하나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필연적이라는 생각이다. 일로 만난 사이로(꽃다발을 선물로 건넨 분은 여자분이다), 나와의 점심 약속에 오는 길에 꽃다발을 사 오셨다고 했다. 큰 백장미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꽃 하나로 기분 좋음. 나의 오후는 이 기분 좋음 하나로 충분했다.


조금 전 집에 와서는 오늘 받은 꽃다발을 나도 모르게 한참을 바라보게 됐다. 꽃다발을 받아 본 지가 언제였지. 생각해보니, 몇 년은 된 듯하다. 고백하건대, 파는 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취향이라서 지레 먼저 연인들에게 "돈 아깝게 꽃다발 사지 말아줘. 그걸 살 돈이면 차라리 맛있는 수제 아이스크림을 사줘." 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난 참 무드고 뭐고 없는 여자 사람이다.


사실 연애할 때, 종종 꽃다발을 서프라이즈로 받긴 했지만 꽃다발보다는 수제 아이스크림 가게를 함께 간다거나 하는 그런 류의 감성과 감동을 좋아한다는 걸, 내 연인들은 알고 있었기에, 풍성하고 화려한 꽃다발보다는 상대가 하면 기분 좋아지는 것들,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 장소, 소소한 물건을 공유하거나 함께 할 때 여자 친구인 내가 배로 행복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작은 것에 찐 행복해하는 구수한 사랑을 했던 것 같다.


꽃다발을 바라보다, 연애의 추억들이 소소하게 사르르 내 마음에 스며드는 것도 나이 탓일까. 지금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아서일까.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가장 최근의 연애 그리고 이 날씨와 똑닮았던 날, 함께 여서 행복했던 나만의 사랑 이야기가 떠올라 날 절로 미소 짓게 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밤, 남자 친구의 친구 부부네 집에 초대받아 저녁 식사를 했던 때도 생각나고 주황색 IKEA라고 쓰인 장우산을 함께 쓰고 그곳 현대 미술관을 서둘러 나오던 그때도 생각난다.


참 그러고 보면 추억이 아닌 곳이, 추억이 아닌 날씨가, 추억이 아닌 냄새가 없구나. 싶다. 꽃을 생각보다 반기지 않는 나를 보면 어떨 땐 그리 낭만적이지 않은 나인가 싶으면서도 내가 가진 모든 경험과 추억을 곱씹으며 미소 짓는 나를 보면 나는 필연적으로 운명적으로 굉장히 낭만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다 혹은 낭만적인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인상 깊었던 기억은 남자 친구의 어머님과 와인을 꽤 자주 함께 마셨던 일인데, 어머님은 킬빌에 나오는 우마 서먼과 꼭 닮은 인상과 헤어스타일을 가졌고 굉장히 힙하고 멋지고 세련된 분이었다. 어머님을 보면 나도 어머님처럼 나이 들어서도 우아하고 섹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평일 저녁 8시쯤, 소파에서 어머님과 도란도란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면, 아들의 지난 울고 웃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아주 맛깔나게 들려주시곤 했다.


화장실에 며칠 째 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걱정해 직접 처방도 내려주셨는데(어머님은 현직 의사셨다), 다름 아닌 푸룬을 뜨거운 물에 넣어 먹어보라고 하셨다. 간단하지만 효과가 곧바로 있었음은 물론이다. 몸살감기에 걸려 끙끙 앓아누웠던 나를 정성껏 돌봐주시기까지 했다. 다 지난 추억이 되었지만 내겐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지나간 사랑, 로맨스를 떠올리면 어떨 땐 아련하기까지 하다. 사랑이 없었더라면 인간의 삶은 어땠을까. 사랑의 가치와 깊이, 그 숭고함을 알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사랑이 내게 주는 파장은 실로 크다. 사랑이 그리워지는 걸 보니, 다시 사랑할 때가 되었나 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사랑에 서두르지 않는다. 급할 건 또 무어냐는 생각이다. 사랑이란,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기가 막힌 타이밍에 찾아온다는 걸 너무도 알고 있어서일까. 자연스럽게 무탈하게 무심하게 불쑥 찾아오면 그때 무심하게 그 손을 잡아보면 될 일이다라는 생각이 크다.


늦은 밤, 귀가 길 버스에서 내린 나는, 역시나 우산을 구태여 쓰지 않았다.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릴 때마다 추적추적 하고 나는 소리에 내 몸을 실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내리는 비를 흠뻑 맞으며 내가 가진 나만의 추억을 만끽했다.


입김도 났다. 하얗게 일어나는 입김을 보니 차가운 계절이 돌아왔구나. 이 계절에 나는 또 내 지나간 사랑을 추억했구나. 아팠던 크기만큼 지금은 그 상처마저 영글어 아름다웠던 사랑으로, 자꾸만 추억하고 싶은, 절로 추억하게 되는 기억들이 떠올라,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차갑고 쓸쓸하고 스산한 계절은 희한하리 만치 수시로 내 삶의 조각조각들을 기억나게 하고 내 삶을 통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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