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내리는 비소리가 날 살포시 깨웠다. 온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비는 무심하게 늘 그렇듯 축축히 내 마음과 발 내딛는 땅을 적시고 있는 중이다. 마치 루틴처럼 믹스 커피 한 잔의 여유까지. 비가 내리는 날 이꼬르 내가 행복한 마음이 드는 날이라는 나만의 행복 공식이 있는데 오늘은 필히 비.하나에 그런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내 마음은 차분해졌다.
뜬금없지만 시간이 왜 이리도 쏜살같은지 달리는 STR보다도 빠른 것 같다. 와우 어떻게 하다 내가 벌써 이 나이가 됐지? 어우 그닥 무언가 해낸 건 없는 것 같은데... 생각이 들었다가도 이윽고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이럴 걸 저럴 걸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그런 일련의 일들을 교훈삼아 지금이라도 해보아?라는 생각까지.한다.
다행히도 흐린 날씨와는 정반대로 내 마음은 흐리지 않아, 맑아서 다행이다. 날씨 중에서도 유난히 비오는 날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무튼 오늘 해피한 상태다. 어제 전에 받은 이메일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볼까하다 메일 한통이 와 있는 걸 확인하고는 꺄악 반가워했다.
파리에 사는 프랑스인 친구 제시카의 이메일이었다. 지금은 11살이 된 제시카의 금지옥엽 딸 호만도 잘 지내고 있고 본인도 일하느라 정신없이 산다는 내용이었다. 친구가 키우는 고양이 빅터는 점점 살이 찌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파리 살던 그 시절이 유독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이메일 끝에 파리에 놀러 올 계획이 없느냐는 친구의 말에 언제 또 가게 될까. 그땐 또 어떤 마음이 들까. 나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잠시 시간을 멈추게 했다.
오늘 같은 날은 부드러운 생크림처럼 소프트하고 퐁퐁한 감성의 성시경의 노래들로 내 마음 빈 곳들을 가득 채워나가야 한다. 노래 재생을 하는 일부터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일까지 마치 명상하듯 수련하듯 가지런하고 바지런하다. 소파에 앉아 비내리는 창밖과 비소리를 눈감고 잠시 듣고 있자니, 내가 왜 그리도 어릴 적부터 비.를 좋아했는지. 어떤 연유로 비를 좋아하게 됐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쩌면 그리 길게 생각할 것도 없는 것이. 그저 좋다. 어두 컴컴하지만 완전히는 캄캄하지 않은 그 상태의 공기와 색채를 좋아한다는 것. 비내리는 날은 유독 그 자체를 감상하기 위해 자주 하늘 위로 내려다 보게 된다는 것. 비소리가 내 귓 속에서 내 심장까지 촉촉하게 스며든다는 것. 그저 그 단순한 것들로 인해 비에 다소 지저분한 것들이 곧잘 씻겨내려가는 것처럼 내 마음 역시 싸그리 씻겨져 내려가는 듯한 쾌감과 청량함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로 인해 불순한, 사특한 내 마음과 생각들을 날려 버리고 싶은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탓이 크다. 무튼 희한하리만치 비오는 날 나는 온전하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어제 잠깐 다이소에 들렀다 2000원 짜리 탁상 달력을 하나 샀다. 집에 와서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2020, 2021 달력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이 시기 동안 뭐랄까. 스스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싶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이 2년이 내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 참 좋았던 시간, 참 생각나는 시간, 내가 조금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다.
참 별거 아닐 수 있지만 내겐 별거 였던 일이 있었다. 올해 초, 2022년 새해 달력 하나를 선물 받았는데, 점묘법으로 그려진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낯익은 그림들로 각 달이 채워진 달력이었다. 달력 표지 앞에는 화가와 그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고 역시나 내가 알고 있는 작가였다.
폴시냑.이었는데 파리 살던 시절 미술관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시절, 폴시냑의 전시가 있었고 점묘법에, 화려한 색감에, 그 중 귀족같은 모습의 한 중년의 그림에서 무언가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진 적이 있어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파리에서 돌아온 직후 받은 받은 달력이 폴시냑의 그림으로 채워진 달력이라니. 심지어 그걸 건넨 당사자는 폴시냑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가끔은 이런 우연의 일치.랄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됐고 그 시절 그렇게 미술관을 드나들었던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2023년 달력을 이제 차곡차곡 쌓아나가야 할 텐데... 사실 다가오는 새해 앞에서 어쩜 이리도 무심할 수 있니. 싶을 정도로 덤덤하다. 나이가 들면서, 한 해 한 해 겪어보면서 내 인생은 생각보다 그리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지 않았다는 걸 경험적으로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일까.
비오는 날 센티해지는 것도 어쩌면 습관일지도 모르겠다. 눈을 지긋이 감고 명상하기에도 최적의 날이 아닐까 싶다. 빗소리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마저 달콤한 이 아침. 내 인생도 내 삶도 무심하게 그러나 작은 달콤함으로 나의 내면을 채워 나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