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토마토 소스를 샀을때 붙어있던 비매품 파스타 1봉이 생각났다. 문득 내일 뭐먹지.를 생각하다. 참, 파스타 있지.했다. 이 밤에 부엌 불을 켰다. 끓는 물에 파스타 1봉을 탈탈 털어 삶았다. 파스타면도 푹 익힌걸 선호하는 나는, 11분 삶은 면이 꼭 알맞다.
내일 아침에 삶아도 되건만, 굳이 이 밤에 파스타면을 삶은 이유는, 갓 삶아 뜨끈한 면으로 만든 파스타보다 미리 면을 삶아 차가운 냉장고 공기를 쐰 파스타면으로 만든 파스타를 선호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파스타면을 이렇게 미리 삶아 냉장고에 넣어두는 편이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대접할 때, 그럴땐 손이 엄청나게 커지는 나는, 꽤 많은 양의 파스타면을 삶아둔다. 파스타라면 뚝딱하고 잘 만드는 편이다. 케이터링을 소규모로 운영했던 시절, 경리단길에 오픈한 쥬얼리 스튜디오의 오프닝 케이터링을 맡았을 때.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놓은 이름 없던 냉파스타.가 인기폭발이었다. 냉파스타가 어쩜 이리 맛있냐며 무엇을 넣은건지 묻기도 심지어 주변 레스토랑 쉐프가 맛보곤 맛있다고 엄지척을 하기도 했던 메뉴이기도 하다.
정말 있는 재료로 즉흥적으로 만들었던건데. 레시피가 따로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내 손이. 내 머릿속이. 내 재료들이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 후로도 특히나 여름엔 주로 냉파스타를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요리할 때. 테이블 스타일링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
무튼 이 야심한 밤에 파스면을 삶고 있자니, 케이터링하던 시절이, 그때의 내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11분에서 12분정도 삶은 후 파스타면을 법랑용기에 덜어냈다. 잠시 찬바람에 식힌 후, 어느 정도 식었다 싶어 올리브유를 듬뿍 뿌렸다. 법랑그릇 수북히 쌓인 노란 파스타면에 내 마음도 덩달아 풍족해진다. 난 참으로 별 거 아닌 것에 부자가 되는 기분을 자주 느낀다.
파스타면을 삶아 식혔다 올리브오일 범벅을 해주고 손장갑을 끼고 고루고루 섞어주고 소분해 나눠 담는 이 단순한 과정도 내겐 명상같기도 수양같기도 하다. 그 순간에도 내 정신은 온통 그곳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이다. 단순 반복적인 과정조차 내겐 즐거움인 이유다.
동시에 단순한 작업일수록 오히려 섬세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러곤 이 문장 하나가 내 일상에도 적용될 만한 곳은 없는지 관찰해본다.
파스타를 많이 만들어보니, 파스타처럼 가성비 좋고 아무거나 무엇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는 재료가 있던가.싶다. 내가 파스타 만들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다.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게. 창의적이기 쉬운 요리 중 하나라는데 있다. 만드는 사람 마음이어도 좋은 게, 내 마음에 쏙 든다.
그리하여 조금 전 마지막 한 줌까지 소분을 마쳤다. 때론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맛을 낼 때가 있어서 그럼 어김없이 과식하게 되는 사태가 자주 일어난다는 이유로, 나는 이렇게 혼자 먹을 양을 만들 땐 아주 조금. 그램은 따로 재진 않지만 나름 예민한 손의 감각으로 한 줌 정도랄까. 어림잡아 그 정도의 양을 하나씩 하나씩 소분해 묶는다. 다음날 차가운 냉장고에서 꺼내 한 끼 한 끼 야금야금 잘 헤치운다.
파스타 양이 한 줌이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이유는, 나머지 재료들을 양껏 푸짐하게 넣어 요리하기 때문인데, 파스타면이 한 줌이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내일 아침 페코리노 치즈를 듬뿍 넣어 만들어 먹을 생각에 내 잇몸은 벌써 만개했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