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키색. 사실 카키색을 좋아하는 취향은 아닌데. 보통은 화이트를 선택할 진대, 그날은 무슨 이유에선지 카키색을 골랐다. 아마도 겨울 나기에는 카키색이 때가 덜 묻어날 것이라는 예측에서였을 것이다.
무튼 지난해 11월, 유니클로에서 세일해서 19,900원에 산 후리스 카키색 외투 하나를 사고선 이 한 벌로 지금까지 입고 있다. 한 겨울 이 외투하나로 대견하게도 버텼다. 사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겨울 외투에 있어서만큼은 무조건 보온성을 추구하는데 그리하여 매 겨울엔 두꺼운 패딩을 입었더랬다.
옷을 싹 정리하던 차에 낡은 외투도 모조리 정리했던 터라, 이참에 새 것으로 보온성 높은 패딩을 구매할까 했지만, 이 후리스 하나면 충분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혹독한 추위도 그렇게 추운지 모르게 보냈다. 기분탓인지 이 후리스 하나가 웬만한 패딩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몇 개월을 이 외투 하나만을 매일같이 입어댔으니, 마모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 봄 기운 가득한 날, 이 외투를 바라보니, 이제 그만 작별할 때가 되었지.싶었다. 올 겨울 따뜻하게 날 지켜줘서 고맙다는 생각까지. 19,900원에, 가성비가 아주 좋았다는 생각이다.(고백하건대, 내 겨울 외투는 이 후리스 하나 뿐이었다)
패딩을 사라면 사겠지만, 내겐 굳이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더러, 나에 집중하게 되면서 겉모습이 있어보이거나 하는 것들에 혹은 남을 신경쓰는 일에 관심이 일도 없게 된 바, 소위 자유로워진 바. 나는 내 삶의 태도대로 외투를 선택한 것 뿐이다.
이런 내가 초라해보일까. 생각한 적은 단언컨대 없다. 그보다는 내 몸과 마음관리가 먼저고 잘 자고 잘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 눈빛과 낯빛을 맑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크다. 이게 관리되면 어떤 옷을 입어도 나는 나대로 빛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아직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서 며칠 혹은 몇 주는 이 외투를 더 입게 될 것 같지만 때가 되면 나는 미련없이 이 옷을 비울 것이다. 오늘보니 어찌나 잘 입었던지 편하게 입었던지 휘뚜루 마뚜루 입고 다녔던지 소매와 기기장밑단 부분이 아주 그냥 너덜너덜 헤졌다는 설명이 맞겠다. 그러면서도 나는 흐뭇.웃고 만다.
아주 많은 부분에서 자유로워지면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옷이다. 참 다양한 모습의 내가 있다는 생각인데, 이렇게 완전하게 편하게 입고 다니는 나.와 또 격식을 차려야 할 때는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의 달라진 모습의, 변신하는 내.가 있다. 나는 이런 나의 반전과 변환이 왜 그리 즐거운지. 사실 즐기고 있다.
메이크업도 눈썹과 마스카라, 립만 바르는데, 이제는 점점 희미해져가는 내 메이크업이 이젠 익숙하고 또 연한 화장속에서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가령 마스카라만 했는데도 이목구비가 사는 걸? 이전엔 왜 발견하지 못했던거지?(블랙 아이라인을 그리지 않으면 생얼과 다름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 얼굴 안에서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비하는 것보다 소비하지 않는 즐거움도 크다. 그 맛을 알아버린 차제에 내가 꼭 사고 싶은 물건은 잠시 아껴뒀다 내게 하나하나씩 선물하는 방식으로 의미를 담아 사곤 하는데. 내가 날 사랑하고 아껴주는 방법 중 하나다.
지금의 나는, 오롯이 나.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가 주인인 내 삶에 누가 콩내라 팥내라 할 수 있을까. 명확하다. 잘 자고 잘 먹고 내가 날 먹여 살릴 수 있으면 된다. 4월이 기다려지는 건 왜 일까. 희한하리만치 좋은 일이 내게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에 설렌다. 아니어도 어떤가. 그런 예감 혹은 기분만으로도 내가 기분좋아지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언제부터인가 내 글은 늘 내 사유의 맺음으로 끝이 나는 듯하다.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나, 현재 내 생각과 내 의식의 흐름이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닌가. 내 글의 느낌도 문체도 감성도... 그 모든 것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