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너에게
오른쪽 손바닥 안에 작은 멍울이 생겼다.
곧 없어지겠지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더해지고, 손바닥으로 무언가 잡을 때마다 걸리적거렸다. 병원에서 악성종양은 아니지만 수술로 제거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말했다.
"손에 힘을 너무 꽉 주고 있잖아. 그렇게 안 잡아도 안 넘어져."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면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꽉 잡는 버릇이 있는데, H는 그때마다 잔소리를 했다.
손잡이를 잡은 채 같이 흔들리는 모습이 더 위태로워 보인다고.
차라리 손잡이 대신 자기를 잡는 게 나을 거라며 팔뚝을 내어주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를 잡고 있는 동안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다.
H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휘청이는 나를 잡아주느라 몇 배는 더 힘들게 버텨야 했을 거다. 그때 우리는 홀로 서있는 것조차 고단한 20대였다.
그 시절의 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위태로워진 집안 사정을 버텨야 했고, 언제 짤릴리 모르는 계약직의 불안감을 견뎌야 했다. 삶 자체가 위태로워서 언제든 넘어질 준비를 해야 했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잔바람에 휘청이는 갈대처럼 미세한 흔들림에도 크게 넘어질 수 있어서 힘껏 손잡이를 잡고 다리에 힘을 줬다. 그리고 지금도 그 버릇이 남아있다.
그 시절 내가 스스로에게 '넘어져도 괜찮아'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넘어지는 것만으로 삶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늘 위태로웠던 삶이라 안정적인 것을 최우선에 뒀던 나는 무언가에 쉽게 도전하지도, 삶을 바꾸기 위해 용기를 내지도 않았다.
결국 위태로움을 참지 못해서 H에게 이별을 고했다.
내 삶은 나 하나 휘청이는 걸로 충분하다고, 너의 휘청거림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나에게 기꺼이 팔뚝을 내어주고, 손을 내밀었던 H는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손 안에 생긴 작은 종양이 H에 대한 기억을 끌어올렸다.
그때 내가 손잡이 대신 H의 손을 잡았다면, 손바닥에 종양이 생기지 않았을까.
알 수 없지만 때때로, 불현듯, 그의 손을 너무 쉽게 놓은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된다. 그렇지만 후회가 길지는 않다. 그러니 잘한 거라고,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이별이란 게 늘 그렇다. 지나고 보면 헤어짐의 이유라는 게 별 것 아니고, 견딜 수 없이 고단했던 삶도 나아지는 때가 온다. 그래서 그때 우리가 그 힘든 상황을 함께 견뎌냈다면 어땠을까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 해도 여전히 나의 선택도, 그의 선택도 변함 없을 거다.
그저 누구에게나 선물같이 잠시 머물러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힘든 한 시절을 버텨내라고. 그 고마운 마음을 상대에게 보답하며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삶이라는 게 늘 어긋남의 연속이라 그럴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러면 그 고마운 마음을 또 다른 상대에게 보답하며 살면 된다. 좋은 사람과의 추억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가난해도 마음을 나누는 데 아낌이 없었고, 차가운 손을 마주잡고 체온을 나누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H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고이고이 추억 속에 묻어둔다. 우리는 또, 오늘을 살아야 하니까. 내가 그렇듯 너도 그럴 거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