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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앤라라 Jan 18. 2022

어른의 세계에서 만난 쓴 맛

좋은 사이 vs. 나쁜 사이

10년을 넘게 다닌 직장을 그만둔 후 충격적이게도 내 뒷담화를 하고 다닌 사람은 가장 친한 후배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상을 공유하고, 연애사를 공유하고, 가족의 경조사까지 챙겼던 K가 내 뒷담화를 늘어놓고 다녔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말은 전해지고, 전해지고, 전해져서 결국 내 귀에 닿았다. 더 이상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사이로 틈이 벌어진 거다. 그 틈을 비집고 못된 말들이 전해졌다. 


K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참고 넘기느냐, 화를 내느냐 사이에서 며칠을 고민했던 것 같다. 참으면 관계는 유지되겠지만 이미 어긋나버린 감정을 그대로 붙잡고 예전처럼 지낼 자신이 없었다. 혼자 고통스러워하다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억울했다. 최소한 상대도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고통이든, 홀가분이든. 


감정이 잔뜩 실린 메시지긴 했지만, K를 탓하는 마음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타인의 진심을 헐값에 매도해버린 그녀의 가벼움에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런데 K는 끝내 그 어떤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죄송해요’라는 한 마디면 끝날 일이었는데, 끝내 ‘회피’를 선택한 거다. 그렇게 나는 10년의 인연을 끊어냈다. 



“다 들었어. 

모른다고 말하지 말고.

잘못했습니다. 열번만 해, 얼른.

우리 이러지 말자. 내가 너한테까지 마음 아프고 싶지 않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대사 중에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다시금 K를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왜 그 흔한 변명조차 하지 않았을까. 

K의 속내를 알 수 없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관계에 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사회에서 만난 우리의 관계라는 게 실은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던 거다. 가족 같았지만 가족이 아니었고, 가깝다고 느껴지만 또 아주 가깝지는 않았던 거다. 관계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착각이 상처를 남긴 셈이다. 


그 사건 이후로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 됐다. 사람을 좋아하고 쉽게 마음을 내어주는 성향까지 바뀔 수는 없지만, 마음을 주지 않은 척 연기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 그렇지만 어떤 관계든 열정을 빼면 헛헛한 껍데기만 남겨져 깊이를 잃는다. 

내가 느끼는 상대에 대한 거리감을 상대도 똑같이 느껴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어설픈 관계만 맺게 된다. 상처받을 일이 없지만, 위로 받을 수도 없다. 


때때로 그때 내가 조금 더 어른스럽게 K의 이야기를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랬다면 관계가 이어졌을 지도 모른다는 헛된 생각.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게 더 좋은 결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갑자기 찾아온 어른의 시간,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할까. 

어릴 때는 모든 것이 투명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으면 그만이었는데, 어른의 세계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쉽지가 않다.

이제는 만나면 좋고, 만나지 않을 때도 좋은 사이를 ‘진짜 좋은 사이’라고 생각한다. 반짝이던 한때를 공유했다는 것만으로 언제든 만나서 하하 호호 웃음을 전할 수 있고, 오랜만에 무심코 전한 안부 인사에 반갑게 답장을 보낼 수 있는 사이. 자주 연락하지 않아도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관계가 진짜 좋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깨달음 하나. 

돌이켜 보니, 그때 내가 원망의 화살을 돌려야 했던 상대는 K가 아니라 그 말을 전한 J였어야 한다. 이런 불필요한 말을 왜 전하느냐고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어야 한다. 누구나 나를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누군가 내가 없는 자리에서 험담을 늘어놓아도 그걸 전하지 말라고 당당히 말했어야 한다. 


“누가 욕하는 거 들으면 그 사람한테 전달하지마. 그냥 모르는 척해. 

너희들 사이에서는 다 말해주는 게 우정일지 몰라도 어른들은 안 그래. 

모르는 척하는 게 의리고 예의야. 

괜히 말해주고 그러면 그 사람이 널 피해. 

내가 상처받은 걸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아무도 모르면 돼. 그러면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


-드라마 <나의 아저씨> 대사 중에서 


진짜 어른의 관계라는 것이 어떤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관계를 맺었고, 동료가 되기도, 친구가 되기도 했는데 여전히 관계에는 물음표 투성이다.


이제는 사회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때로는 동지가 되기도 때로는 적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그래서 타인의 말에 너무 상처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 누군가 무심코 뱉은 생각 없는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다만, 스스로를 다독인다. 타인의 말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나는 그러지 말자고. 

말에 담긴 의미에 매순간 집중할 필요는 없지만, 누군가 내가 뱉은 사소한 말에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니 조심하자는 생각이다. 진짜 좋은 사이가 되려면 때때로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어른의 세계를 걷고 있는 이제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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