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아이와 함께 잠자리에 누운 어느 날 밤이었다. 수지는 자기 전에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날은 갑자기 "엄마 나 커서 뭐가 되고 싶냐면~ "하고 말을 시작했다. 나는 수지가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한 마음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나는 커서~ 엄마 아빠랑 호텔 가고 싶어."
이 말에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가족여행을 갈 때마다 주로 호텔에 묵었는데, 수지는 여행지에서 어떤 특별한 곳을 가는 것보다 호텔에 가는 걸 더 좋아했다. 여행지보다 '호텔'에 가는 그 자체를 더 좋아하는 아이다.
수지의 호텔 사랑은 정말 남다르다. 여행지에 가서 밖에서 놀거나 구경하는 것보다 호텔에만 있고 싶어 한다. 수지의 여행 스타일은 호텔 안에서 온전히 쉬는 '호캉스' 다. 어린아이가 벌써 이런 호캉스의 맛을 아는 게 웃기면서도 참 귀엽다.
이런 수지는 커서 되고 싶은 것도 '엄마 아빠랑 호텔 가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수지야, 엄마 아빠랑 호텔 가는 거는 지금도 갈 수 있잖아~"
수지는 "아 맞네" 하더니 깔깔 웃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 나 커서~ (뜸을 들이다가) 간호사 하고, 호텔 가고 싶어"
난 또 한 번 웃음이 빵 터졌다.
수지가 커서 뭐가 된다는 것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거나 직업을 갖는 것이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세상에 어떤 직업이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살아가는지 잘 모르다 보니, 자신이 아는 한정된 직업 중에서 하나를 고른 듯하다.
그게 간호사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호텔에 가는 건 빠지지 않는다. 이 정도면 수지가 되고 싶은 건 그냥 호텔 가는 사람이다. 진짜 본심은 '호텔 가는 것' 이면서 괜히 앞에 '간호사'라고 말한 게 무척 귀여웠다.
호텔 가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 수지가 나중에 정말 호텔이나 여행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잠깐 해봤다.
그리고 웃으며 수지에게 말했다.
"그래, 간호사 되고 호텔 가도 되지~"
여기서 대화가 끝이 나나 싶었는데 끝이 아니었다.
수지는 또 한 번 말을 이어갔다.
"엄마, 나 커서 아무것도 안되고 싶어~ 하하하"
이렇게 말하고서는 날 껴안았다.
우리는 동시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도 수지를 꼭 안으며 말했다.
"그래~ 아무것도 안돼도 돼~"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수지는 이후에도 한참 혼잣말을 하면서 놀다가 잠이 들었다.
수지는 잠이 들었지만, 나는 수지가 한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한동안 곱씹게 되었다.
수지가 '아무것도 안되고 싶다'라고 했을 때, 내가 '아무것도 안 돼도 된다'라고 말한 건 진심이었다.
사실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살아가면서 여러 경험을 쌓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또는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어도 괜찮다.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나 역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때그때 하고 싶은 선택들을 하며 흘러가다 보니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 같다.
나는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 만족한다. 그 이유가 눈에 보이는 조건들 때문만은 아니다. 직업이나 직위가 내 행복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내 삶' 자체가 좋다. 어떤 사람이 되지 않아도, 어떤 위치에 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내가 좋아하는 삶을 살고 있다.
행복은 외부 조건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외부 조건이 내 행복에 어느 정도 영향은 주겠지만, 오래 지속되는 행복은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는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되고 싶다는 수지에게 '아무것도 안 돼도 된다'라고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돼야지, 어디에 취직해야지, 어디까지 올라가야지' 하고 목표를 꼭 정하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들을 하다 보면 그 선택들이 자연스레 나를 이끌어 줄 것이다.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한 걸음씩 내딛으며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그 발걸음이 결국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것이다.
난 정말 수지가 어떤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니, 그냥 건강하고 많이 웃고, 자주 행복을 느끼며 자기 마음이 가는 대로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떤 목표만을 바라보며 경주마처럼 달려가기보다는, 너무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여정을 즐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시간을 음미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가까이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수지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 말이 문득 나 자신에게로 향했다. 나에게도 진심을 담아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으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만끽하며 내가 좋아하는 선택을 하면서 자주 행복을 느끼기를'
아이랑 나눈 대화로 시작된 생각이 나에게도 깊은 울림이 되었다.
아이와 함께하며 '나 자신으로 사는 진짜 행복한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하루하루를 정성스럽게 보내려는 마음이 더 깊어져 간다.
내 아이가 정말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세상의 잣대에 맞추기보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으로 채우는 '나만의 고유한 삶'을 마음껏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내 아이도, 나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