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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밤 Jul 09. 2019

일상에도 환기가 필요하다.

느릿한 시선으로 바라본, 곳-의 이야기

나는 빈번히 혼란을 겪기에 주기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쿨다운을 시켜주는 순간이 필요하다.


그러한 순간을 갖기 위해서는 산책이 필연적이다.

때때로 게을러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자에게 산책은 사치스러운 말이기는 하다만, 무엇이든 우선순위가 앞선 것들은 어떻게든 이루어진다(한 번의 산책은 또 다른 혼란을 겪기 전까지 살아갈 힘을 마련해주기에 그의 우선순위는 내게 있어 꽤나 앞서있다).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을 거니는 산책, 초여름의 저녁 산책은 다른 날의 다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늦은 시각까지 지지 않은 해는 길었던 하루를 잔뜩 머금은 채로 서서히 저물어간다.


빠듯한 하루를 짊어진 채로.


해를 따라 바쁘게 보낸 하루를 마무리하며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자면, 나 또한 서서히 저물어가는 듯하다. 여름 해와 같은 부지런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선선해진 저녁시간을 거닐 때면 느릿한 걸음과 함께 머릿속도 천천히 하루를 마무리한다.


한여름이 되기 전, 아직은 선선한 어느 날 좋은 저녁, 유난히 제대로 거닐고 싶은 날이 있다. 빙 돌아 집 앞을 하염없이 거니는 산책도 좋지만 왠지 집 앞에서 벗어나 뒷산이라도 오르고 싶은 그런 날, 꽤나 멀리 산책을 떠나본다.





복작복작한 대학로를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나면 도착하는 낙산공원. 이 가파른 언덕은 혜화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오는 것도 좋고 차를 타고 와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 것도 좋다. 앞으로 걸어 올라갈 길이 적지 않기에 그 정도쯤은 엔진의 힘을 빌려도 좋을 듯싶다.


이곳, 낙산공원에서 마주하는 서울의 북쪽은 나름 근사한 자태를 보인다.



조명을 어찌 비추냐에 따라 같은 대상일지라도 천차만별로 보이듯이 대낮에는 그저 높다란 건물과 산 뿐이던 도시가 노을빛을 받아 어딘가 분위기를 지닌다.

한때는 서울의 자랑스러운 든든함이었을 한양도성을 따라 들숨과 날숨의 텐션을 조금씩 올려 걷다 보면 어느새 탁 트인 정상에 오르게 된다.

늦은 오후의 빛과 함께 시작한 걸음을 멈추고 정상에서 바라본 하늘에는 옅은 붉은 기운이 서서히 꼼지락댄다. 그리고는 조금씩 그 채도를 높여 스멀스멀 번져나간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삼삼오오 모여 파란 하늘이 다양한 색조와 채도로 번져나가는 그 순간을 만끽한다.


어느 날은 몹시도 요상한 날씨의 날이었는데, 지겹도록 반복되는 뿌옇고 미세먼지 가득한 무더운 나날들과 비가 오는 나날들 가운데 만난 맑은 하늘이 반가워 마음을 굳게 먹고 온 가족을 이끌고 집을 나섰더랬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는 도중 남산타워 쪽 그러니까 우리가 향해 가는 쪽의 하늘이 짙은 먹색에 가까운 회색으로 어둑어둑해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금세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떠나온 곳의 하늘은 파랗고 하얀 구름이, 말 그대로 뭉게뭉게 펼쳐진 예쁜 하늘임이 분명한데 앞을 보면 무섭도록 짙은 회색의 기운이 가득하고.. 다시 돌아갈까도 고민했지만 일단은 앞을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아니 어떻게 갑자기 이럴 수 있는 거냐 궁시렁대며 하염없이 내리는 비 사이로 달리던 중 비를 헤치고 한 터널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니 무슨 영화 속 장면 바뀌듯 휙 하고 이전보다 맑은 하늘이 등장했다. 정말 얼마 만에 보는 파아란 하늘이었는지. 흰 구름이 많기는 했지만 그 틈새로 보이는 하늘의 색은


우리나라에서 정말,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채도 높은 청색의 하늘이었다.



반가운 하늘을 마주한 채 급경사의 언덕을 오르고 올라 도착한 산 중턱의 공기는 차갑고 깨끗했다. 늦은 오후의 햇빛을 머금은 하늘과 공기는 ‘산책’하는 자들을 위해 어느 누가 설정해 놓은 듯 완벽했고. 약간의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내딛는 발걸음은 지나치도록 상쾌한 시작을 알렸다.



혼자 하는 산책과 친구와 함께 하는 산책, 가족과 함께하는 산책은 저마다 다른 기분과 다른 느낌의 휴식을 안겨준다.

친구와 함께한다면 또래이기에 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을 공기 중으로 부유시키는 새에 나도 모르게 내 고민과 얽힌 이야기들이 정리되기도 하고, 가족과의 산책은 왠지 모를 편안한 시간으로 남는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가족이기에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 같은 속도로 걸으며 천천히 깊게 머무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혼자 하는 산책은
오롯이 나를 위해 보내는 시간이다.


현재 진행으로 이루어지던 모든 상황을 한 걸음 뒤로 나와 고민하고 사유하는 순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나를 바라본다.

서울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볼 때 황혼의 빛이 그곳을 드리워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듯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보다 보면 어디선가 빛이 환하게 비추며 혼란스러웠던 갈피들이 길을 찾아 자리를 찾아가는 듯하다.


일상에서 향하는 길에는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산책은 대체로 목적지가 없다. 그저 내가 갈 만큼 간 뒤 뒤돌아 돌아오면 된다.

단 한 가지, 내가 되돌아 갈 체력은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 그것만 염두에 둔다면 속도가 어떠하든 어느 방향으로 가든 내가 정하기 나름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저녁시간의 하늘은 그 색이 화려할수록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 특히나 새로운 장소에서 만끽하는 해 질 녘의 하늘은 더한 감상을 일으킨다.

오랜만에 정말 아름다운 색의 하늘을 마주하니 마치 여행을 온 듯했다.


적도 부근의 섬으로 여행을 갈 때면 매일 저녁노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날의 공기, 구름의 정도에 따라 매번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기에. 적도의 하늘은 특유의 구름의 형태와 하늘의 생김새가 굉장히 이질적이라 더욱이 매번 순간을 챙기게 된다.


여행지의 사진에 그곳의 공기가 묻어 나오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은 부질없지만 매번 반복된다.

여행지를 그저 사진으로만 즐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게 즐겨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은 너무 넓고 겪어보지 못한 황홀한 순간은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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