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이 드디어 끝난다. 11월 말부터 어서 남은 한 달이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유독 길었고, 유독 힘들었다. 몸은 마치 독이 번진 것처럼 쉽사리 회복되지 않고, 마음은 배터리가 충전되지 않는 듯 알 수 없는 갈증만 남아 있다. 몸도 마음도 고군분투한 한 해였다.
가만히 누워 있다가 깨달았다. 나는 올 한해 내내 누군가가 ‘되려고’ 애썼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 좋은 동료, 좋은 팀장, 좋은 가족, 좋은 친구가 되려는 절대 이룰 수 없는 목표, 해낼 수 없는 것들을 해내려고 애쓰느라 내가 되는 법을 잊었다. 지금 보다 나은 누군가가 ‘되는 일’에만 너무 집중했다.
문득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고 실소했다. 벌써 서른다섯이나 됐는데, 아직도 뭐가 될 게 남았다는 건가. 또 뭐가 된다는 말인가. 지금과 다른 누군가가 되는 대신에, 괜찮다가, 좀 덜 괜찮다가, 좋다가, 좀 덜 좋다가, 또 그럭저럭 괜찮은 나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아직 너무 ‘더 나은 나’를 위해 점수 매기며 살고 있다. 오랜 습관처럼 말이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매일 매일 점수 매기며, 미래만을 보고 살던 시절.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이 지금보다 더 나은 게 있다면, 결승선이 보였다는 거다. 내신, 모의고사, 수능, 논술로 이어지는 입시라는 결승선을 향한 코스는 누구에게나 똑같았고, 누구에게나 명확했다. 무엇을 위해? 라고 물어본 적은 사실 별로 없었다. 너무도 당연한 명제였다. “대학생이 되어야 한다” 는 것.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은 유독 더 생생하고, 더 가슴 뭉클하다. 그 결승선 바로 직전의 시간이라서 그런 걸까. 결승선 직후에 달라져버린 삶이 너무 극적이라 그런 걸까.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라는 긴 제목의 영화는 일본의 한 고등학교의 생태계를 다룬다. 그리고 ‘키리시마’라는, 이름만 등장하는 그 학교의 슈퍼스타를 둘러싼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영화 내내 묵묵하게 관찰자처럼 등장하는 히로키, 잘생긴 히로키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며 눈물을 흘릴 때다. 히로키는 야구부였고, 아마도 입시준비를 위해 야구부를 그만두었다. 그에게는 학교에서 잘나가는 무리 중의 하나인 여자친구가 있고,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같이 학원엘 간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멍하기도 하고, 뚱하다. 아마도 히로키는 지금이 아닌 ‘언젠가’를 위해서 살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그는 여자친구와의 연애에도 열정적이지 않고, 야구부도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그런 그이기에 동아리 활동에 그렇게나 열심인 3학년 야구부 선배가, 학교 전체의 놀림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영화를 찍는 영화부원들이 신기하다. 그는 3학년 야구부 선배에게 묻는다. 선배는 왜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지 않느냐고, 이제 다들 입시 준비하러 그만두는데 선배는 왜 아직도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느냐고 말이다. 야구선수가 될 것도 아니고, 입단 제의를 받은 것도 아닌 선배를,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살기도 벅찬 시간에, 야구선수가 되리라는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끝까지 해보려는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는 거다.
히로키는 좀비 영화를 찍고 있던 영화부 부장 마에다에게 말을 건다.
영화 감독이 되려는거야? 아카데미에 가는 건가?
영화 감독은 무리야.
그럼 어째서 이런 지저분한 카메라로 굳이 영화를 찍는거야?
그건, 아주 가끔씩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랑 지금 우리가 찍는 영화가 연결됐다고 생각 될 때가 있어. 그게 그냥 좋으니까
이상한 분장을 하고, 여기저기 쫓겨 다니면서, 남들의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도 마에다는 그냥 영화가 찍고 싶어서 찍는다. '언젠가'를 위해 살던, ‘누군가가 되기 위해 살던’ 히로키는 이상하다. 왜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는 일에 다들 열심인 건지, 그러다 문득 그들을 통해 깨달아버린 것 같다.
지금 즐거운 일, 지금 내 자신을 두근거리게 하는 일을 하는 누군가를 보면서 그가 꿈꾸던 언젠가는 공허하다는 것, 지금 자신을 두근거리게 하는 무언가를 놓치고서는 결국 어떤 사람이 되건 무엇도 아닐 것임을 깨닫는다.
언젠가를 위해 살던 시간, 누군가가 되려고 애쓰던 나. 중요한 건 지금의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인데, 내가 나로 살아가는 것을 왜 잊고 있었을까.
경상도 사투리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이 ‘내가 낸데’ 란 말이었다. ‘나는 나야’ 라는 새침한 말 보다는 좀 더 고집스러운 느낌, 별 수 있냐는 말투.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좀 재수 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내 자신에게는 자주 써도 되는 주문 아닐까.
‘내가 이렇게 나인데 뭐 어쩌겠는가.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자’를 줄여 ‘내가 낸데’ 라고 되뇌어야지. 내가 나인데, 뭘 어떻게 또 고친단 말인가? 서른다섯해동안 만들어진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더 나은 누군가가 되려고 하지 말아야지. 누군가가 되는 대신, 이제 무언가를 해야지. 나를 더 행복하게 하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그래서 '언젠가' 대신, '지금'을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