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_당산철교의 순간

by 램램

대학 1학년 때, 나는 경기도 수원에서 신촌까지 통학을 했다. 왕복 4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고, 1호선을 타고 신도림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는 과정은 인간의 파도 속에 몸을 맡기는 일이었다. 지옥 같은 등교길에도 낭만적인 순간이 있었다.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 당산철교를 지날 때 LG쌍둥이 빌딩 사이로 63빌딩이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좋아해서 항상 그 쪽 창가에 서있었다. 사람이 많은 날엔 창 밖을 보기도 힘들지만 63빌딩이 금빛 얼굴을 ‘반짝’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소원을 빌었다. 그 순간은 정말 짧고, 바로 터널로 들어서기 때문에 소원을 미리미리 열심히 준비해두어야 했다. 20대 내내 그 구간을 지나는 순간마다 소원을 빌었는데, 소원은 자주 바뀌었던 것 같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내 마음에 답해주기를 바라기도 했었고, 어딘가에 합격을 기원하기도 했었고, 누군가의 건강을, 누군가의 행복을,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기를, 이라는 소원을 빌기도 했었다.

사본 -[여의도]05T05601Dc4000.jpg 당산철교 너머 여의도와 빛나던 건물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아이들은 새로 생긴 고속열차 소식을 듣고, 기차가 반대편에서 서로 달려오다가 스쳐지나는 순간에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저마다의 소원을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 화산이 폭발해서 아빠와 동생이 사는 곳으로 이사가 다시 함께 살기를, 강아지가 되살아나기를, 야구선수가 되기를. 저마다 구체적이고 사랑스런 소원들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기차 두 대가 마주치던 순간에 아이들이 힘껏 외친 소원들은 ‘반짝’하며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터덜터덜 모험을 마치고 오지만, 그 사이 아이들은 한 뼘 더 자라있다. 무언가를 원하지만 모두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새로운 뭔가를 또 소원하고, 좌절하고, 또 원하면서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소원이 마법처럼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열심히 마음에 새긴다. 간절히 소원해보고, 이뤄지지 않으면 마음 속에 그 하나를 묻고 또 다른 소원을 심는다. 어떤 씨앗은 그대로 잊혀지지만, 종종 거기서 싹을 틔우는 소원들이 있고, 잊고 있던 와중에 전혀 다른 열매로 나타나기도 한다. 짝사랑의 소원은 빛나던 나의 청춘을 되새길 수 있게 기억 속에 생생하게 기록되었고, 합격을 바라던 그곳에 취업하진 못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성숙해졌다. 가족의 건강, 친구들의 행복, 세상의 평화 같은 건 언제나 빌어도 빛바래지 않는 초록빛의 소원들이다.


문득 지금 내 소원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싫은 것도 많아지고, 피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는데, 원하는 건 오히려 더 명확하게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잠들기 전 습관처럼 내 인생의 키워드가 무엇인지 되뇌어 보곤 한다. 그것은, 여성과 영화다.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길. 여성들과 함께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길. 그리고 부끄럽지 않게 하루를 살아내길. 부끄러워지지 않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은 모두 명확한 동사다. 목소리를 높이고, 용기를 내고, 다른 이들과 연대하고, 함께 싸우고, 항상 앞을 향해 가고, 넘어지더라도 손잡고 쉼없이 일어나길.


더 많은 여성들이 스크린에 등장하고, 더 많은 여성영화인들이 영화일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영화계는 원래 그렇고 그런 곳'이라는 말을 하는 대신, '영화계는 그렇기에 더 할만한 곳' 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피프티 피플>에 이런 대사가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시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이런 믿음이 나의 소원이다. 나의 돌멩이가 지금 어딘가에 닿지 않더라도, 다음 세대의 누군가에게 전해진다는 믿음. 저 멀리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돌멩이를 누군가가 주워 던져 단단한 세상의 부조리를 깨는 데 던져주기를. 하나의 씨앗을 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소원이 언젠가 싹을 틔워 누군가의 희망이 되기를. 그런 마음이 언젠가의 기적을 만드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