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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줴이 Aug 08. 2020

Y의 집

Nirvana에서 시작된 너와 나

Y는 같은 전공의 남자 후배였다. 전공도 전공이지만 전공과 무관한 장르의 음악으로 일상의 비어있는 일탈의 시간을 채운다는 점에서 우리는 일말의 동질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뮤지션을 나도 알고 있었을 때, 비 오는 줄도 모르고 밤늦은 시간까지 연습실에 머물러 있다가 버려진 우산을 같이 쓰고 나오게 되었을 때, 주말에 우연히 통화하게 됐는데 마침 내가 그의 동네를 지나치고 있었을 때, 이때 우리는 좀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언젠가 같이 그의 동네 주변에 머물러 있었을 때 자신의 새로운 그랜드 피아노를 자랑하고 싶었던 건지 어쩌다 Y의 집엘 가게 됐다. 비빔국수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가 집에 방문한 건 처음이라고도 했다. 나는 또 왜 순진하게 그의 집안으로 발을 들였던 건지 지금 생각하니 참 맹랑하네.

연식이 좀 돼 보이는 서울의 고급빌라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예상하지 못한 공간의 크기와 그 크기에서 느껴지는 으스스함, 그리고 그 공간이 지니고 있는 애매한 어둠에 기가 눌렸고 그의 집 1층으로 들어가는 길목 동네에서 흔하게 볼 법한 주민들의 움직임이 없어 약간의 싸늘함도 있었다. 내가 살아온 환경과 다르다는 점 때문에 느낀 괴리감,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데 거대하고 묵직해서 더 이질적이었던 동네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그가 해준 비빔국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보다 더 놀랍게도 딱 시모토 바나나르헨티나 할머니에 묘사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퀴퀴한 이미지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상당한 기간 동안 통풍되지 않은 듯 보이는 집안의 공기, 그 공기와 함께 주저앉아 있는 1층의 어둠, 모든 물건의 어깨 위로 족히 1cm 이상의 두께로 앉아 있는 먼지들, 그 먼지들과 함께 싱크대 위로 마중 나와있는 온갖 양념장들. 난생처음 경험한 집안의 풍경은 책에서 본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집이 절묘하게 묘사되는 바람에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할 만한 수준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연습실에서 나오던 비 오는 그날,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종종걸음 걷던 그날, 비에 젖지 않으려 그의 팔뚝의 옷깃을 소심하게 잡았던 그날, 그날들 이후 그는 날 자주 소환했고 나의 연인이 되어달라는 이메일로 고백까지 받게 됐지만 우리들의 관계는 아름답지 못했다. 내가 대차게 거절했기 때문에.

Y의 집에 들어가게 된 게 고백 이전이었는지 아니면 그 훨씬 이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쩌면 그의 가방 솔기에 묻어있던 얼룩이 우리들의 젊은 아름다움을 방해했는지도 모른다.
나이 어린 남자가 흥미롭지 않았던 건지, 담배냄새가 미세하게 배어있는 그의 물건들에 거부감을 느꼈던 건지, 커트코베인을 닮은 그의 머리카락이 커트코베인이 아니어서 싫었던 건지. Nirvana에서 이어진 우리의 관계가 현재까지 이어져있진 않지만 나는 가끔 그의 집과 그의 피아노, 그리고 그의 제스처에 포함되어 있던 미세한 떨림 기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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