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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줴이 Aug 09. 2020

나의 오지랖

한 우물을 파지 않아 다행인 지난 방황의 시간들

호기심 많던 이십 대의 나는 전공 이외의 것에 다양한 관심을 두고 살았다. 어쩌면 도피성 핑계였을 수도 있다. 전공인 클래식과 무관한 음악으로 하루를 연명하듯 시간을 채우고, 뻔질나게 대학로 소극장에 드나들며 연극을 봤다. 카메라에 빠져서는 사진을 핑계로 싸돌아 다니고, 삶이 지루해 조리사 자격증에도 도전하며, 없어도 살아가는데 무방한 온갖 것들을 미싱질로 바느질해 만들어다.

이런 내 오지랖을 보다 못한 같은 전공의 한 친구는 나에게 한 우물만 파라며 조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건가 의문으로 가득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무렵,  이 상황을 알게 된 또 다른 친구는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위로다. 네가 지금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 분명히 제 값을 할 것이.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정말 잘못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나를 위로하려 드는 또 다른 친구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지, 그때는 그 무엇도 아차리지 못했다.

부모의 반대를 뿌리치고 증오와 오기로 돌진했던 전공 선택은 결국 미련 때문에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내 이십 대는 늘 방황의 연속이었다. 나 자신으로부터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겉돌았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고, 그렇게 밥상 앞에서 눈물의 시간들을 보냈는데 이제와 보니 지난 방황의 시간은 나를 다지는 과정일 뿐이었다.

한 우물을 파라고 조언한 그 친구는 일찌감치 석사를 마결혼에 이르렀고, 그 이후엔 어찌 살고 있는지 알 지 못한다. 우리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였으니까. 그 친구의 우물이 현재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혹은 우물 밖으로 나와 또 다른 세계 경험하고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이제와 분명한 건 지난 나의 오지랖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한 우물이 아닌 여러 우물을 기웃거린 덕분에 얕지만 방대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고, 그 경험은 나를 설명하는 분명한 증거가 되었으니까.

어떤 이도 타인의 삶을 논할 수 없다. 각자의 때는 자기 방식의 가치 기준대로 존재하는 법이. 나는 내 속도에 맞게 걸어왔을 뿐이고 내 방식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잘못 선택한 길은 아닌지 늘 의문으로 가득한 시간들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온갖 방황을 껴안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일 말고는 없다. 늘 숨쉬기 버거운 시간들이었고 암울의 세계가 아니고는 내 이십 대를 설명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에 지난 나의 오지랖에 대한 설명과 확인은 이미 끝난 셈이다. 나는 분명히 내 방황으로 인해 성장했고, 방황하는 동안 거쳐온 내 오지랖은 지금의 나를 설명한다. 더불어 나의 그때를, 그때의 불안을, 지금의 내가 온전히 사랑한다. 나를 향한 내 오지랖은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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