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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줴이 Jan 20. 2021

이타적인 냉혈인간

선한 마음이 훼손당한 때

 십수 년 전, 지역의 청년단체를 통해 봉사활동을 한 일이 있다. 연중행사인 크리스마스 연탄 봉사를 시작으로 정기적으로 지역의 독거노인들을 위한 반찬 배달까지. 그중 반찬 도시락 배달은 몇 가지 반찬과 국을 만들어 정해진 독거노인들에게 배달해 주는 형식이었다.

 우리는 어르신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워 특징적인 단어들을 조합해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이를테면 자매 할머니, 폐지 할머니, 이쁜이 할머니 등.

 당시 도시락을 배달하면서 느낀 불공정에 대한 답답함은 반찬 수혜를 받는 독거노인들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도저히 내 기준에서는 도움이 필요해 보이지 않는 이쁜이 할머니 댁의 살림살이는 혼자 살기엔 충분히 넓고 쾌적해 보이는 거주 공간이었고, 온갖 치장으로 블링블링한 액세서리와 뙤약볕에 노출되지 않았을 법한 곱디고운 얼굴은 무료 도시락과는 분명 어울리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배달 갔을 시점에 자신의 집에 놀러 와 있는 한 할머니를 지칭하며 다음엔 이 할머니에게도 도시락을 배달해 달라는 매우 간단하고 쉬운 발언을 하는 게 아닌가. 폐지 할머니를 통해 본 삶의 열악함과 자매 할머니를 통해 본 사회 복지의 불통 앞에서 이쁜이 할머니는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밥알을 빼앗아 먹는 것처럼 보였다.




 어릴 적 우체통에 넣어져 있던 적십자 회비를 순진하게 입금하던 때가 있었다. 고지된 금액을 지불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그때의 나는 분명 행동만으로는 이타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구세군 자선냄비나 온갖 비영리 단체들의 투명하지 않은 모금 활동을 알게 되면서 나는 어느새 타인의 가난과 돈의 행방을 의심하고 있는 정나미 없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직접 몸을 써가며 내 눈앞에서 불쌍한 이들을 돕고 말지 나의 선한 도움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경로들을 지독하게 의심하고 불신하는 냉혈인간이 된 셈이다.

 자매 할머니들을 알게 된 이후 얼마 안 된 시점에 동생 분이 돌아가셨고 청년단체의 몇 멤버들이 장례식장을 지키게 되었다. 십시일반 조의금을 모았고 한산한 장례식장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죽은 이의 시간을 지키던 중 과연 이 돈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생각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란 인간은 참 비정하구나 느낄 무렵 할머니의 자식들이 줄줄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외롭고 가난했던 노인은 버려진 엄마였단 말인가. 때깔 좋은 낯짝으로 나타난 큰 딸의 거주지는 강남의 부촌이었고 뒤이어 줄줄이 나타난 자식들의 감정에 엄마를 잃은 슬픔은 없어 보였다. 내 지갑에서 나간 삥 뜯긴 느낌의 조의금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구질구질한 감정이었음을 고백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데 이 모든 이타적 행위는 누구를 위한 일이었나. 모두에게 친절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마음이 훼손당한 그때, 선한 마음이 변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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