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습관처럼 구매하고 있는 다이어리는 20살 이후 지속되고 있는 나름의 새해 의식 중 하나이다. 일기는 아마도 청소년 시기부터 썼던 것 같은데 당시의 일기장과 편지들은 과거의 궁상맞은 추억팔이밖에 안 되는 것 같아 수년 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지난 일기장과 편지들을 들추어내는 일들은 결국 시간을 할애해 과거를 회상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 시간들이 궁상맞다 여겨진 탓이다. 다만, 성인이 된 이후의 기록물들을 남겨둔 이유는 나름의 가치관이 성립된 이후 살아온 날들의, 그 토대들의 기록이란 점에서 숱한 고민과 낙담, 절망의 시간들을 애써 삭제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
나름의 의식처럼 행해지던 새로운 해의 새로운 다이어리 구입은 빠짐없이 내 삶을 기록했다. 시간이 지나 지난 다이어리들을 들추어 보니 절망의 시간으로 가득했던 해일수록 다이어리는 백지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루의 기록이란 것은 어쩌면 일말의 심적 여유가 있어야지만이 가능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 하나, 삶이 나락으로 빠져들수록 사고의 깊이는 저 밑으로 더할 나위 없이 깊어진다는 것. 그러니 삶과 예술은 고통 없이 완성될 수 없다는 말을 지난 내 기록들 앞에서 두 눈으로 확인한 셈이다.
20대의 언젠가 나는 다이어리에 이런 글귀를 적었더랬다. 지금의 이 고민들이 10년이 지나 30대, 또 그 이후 40대에 이르러서도 같은 내용으로 반복될 것을 안다고. 정말로 30대에 이르러서 10년 전의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나는 어째서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개뿔도 모르는 인생을 논했을까. 놀랍기도 하고, 또 삶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인간 삶의 본질이란 게, 한 인간의 삶이란 게, 삶을 향한 인간의 사유라는 게, 하나의 점에서 출발해 결국 그 작은 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 말이다.
습관처럼 행해오던 새해의 다이어리 구입은 이제 뭘 쓰지 않더라도 구비해놓지 않으면 불안감이 몰려온다. 기록하는 모든 것들에 넌덜머리가 나 언제부턴가 모든 기록들을 거부하고 있음에도 다이어리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는 내 삶의 시간들을 마냥 증발시키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 삶이니 내 삶에 대한 예우를 갖춰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나를 기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유의 결과물이 아닌, 소소한 행위에 대한 기록의 집착이 사라지면 점점 내 다이어리는 백지상태로 가득해지겠지만, 그 백지마저도 내 삶에 대한 기록이니 매년 새로운 다이어리를 마련하는 행위는 아마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