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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호 Mar 27. 2018

친구 7


잊고싶은 이야기와 잊어버린 친구들 7


이야기 아홉


철학자의 길을 가다가 불귀의 객이 된 친구와는 워낙 스토리가 많다.

고등학교 때 겨울은 늘 혹독했다. 주머니가 비어서 용돈을 마련하려고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솔직히 나는 사슴 새끼들과 썰매, 그리고 구질구질하게 여러가지 자잘한 그림도 많이 그려넣고 색도 많이 칠해야 하는, 말하자면 손 많이 가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드는 것을 싫어했다. 시간도 많이 소요될 뿐 아니라 생산성도 현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는 하루에 몇 백 장씩 절대 만들 수가 없다. 반면 먹물 찍어서 대강 대나무나 난초 찍찍 그리고 한문으로 근하신년이라고 쓰면 한 장 당 1분이 걸리지 않는다. 거의 찍어 내듯이 그릴 수 있을 만큼 쉽다. 하지만 그게 훨씬 잘 팔렸다. 그림은 내 담당이고 판로는 그 친구 담당인데 워낙 마당발이라 정말 잘 팔았다.

그 해 겨울 우리는 벌어들인 돈으로 음주가무에 있어서 아주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대학 시험에 떨어지고 둘은 무작정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서로 창 밖만 보고 있었다. 서로 말을 잊었다. 꽤 오랜시간 기차는 달렸고 낙방생 둘의 깊은 생각도 철길을 따라 하염없이 달렸다. 기차는 더 이상 달릴 곳이 없어서 멈추었고 우리는 내려서  해운대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드넓은 바다, 차가운 바람, 코발트 빛 시린 하늘은 시린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하기 충분했다. 아무도 없는 모래 백사장을 걸으며 동백섬에서부터 동쪽 달맞이 고개까지 천천히 걸었다. 말을 잊은 걸음은 무거웠고 밟고 지나간 모래의 자국은 파도가 또  천천히 지워주었다. 가슴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천천히 지워주듯이...

그 중간에 가장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극동호텔.


둘은 언 몸을 녹이려고 호텔을 기웃거렸다. 이내 따뜻한 호텔 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별 세개 모양의 파친코 그림이 살살 마음을 꼬신다.

"야 우리도 한번 해보자"

둘은 코인을 바꿔서 열심히 바를 잡아 당겼다. 될듯 말듯 이 거지같은 기계가 돈을 다 쳐먹는다. 다 털려서 완전 거지됐다. 비상금 모아서 바람 쏘이러 왔다가 정말로 쌩 거지가 된 것이다. 털리고 나니까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어찌해야 할지 대책도 없었다.

한심한 둘은 부산에 오자마자 빈털털이가 되어서 어디 비벼댈 연고가 없는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부산에는 펜팔을 하던 여자가 서면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전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일단 서면 근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둘은 남은 잔돈으로 서면행 버스를 타고 동그라미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도 못 시키고 한 시간 남짓 전화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배도 고프고 기운이 빠져서 한심하다는 소리만 서로 늘어놓고 있었다.


검정스타킹의 올이 유난히 번쩍거리는 종업원이 다가와 커피 두 잔을 성의없이 놓고 간다. 커피를 시키지 않았다고 하자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눈짓으로 가리킨다. 저 처녀가 시켰다고.

고맙다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둘이 푸념하고  있었던 것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빨간 모자에 빨간 재킷과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우리를 데리고 나가 저녁을 사주고 숙소도 잡아줬다. 시간이 늦어 서울로 가는 열차가 끊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명 분의 서울행 열차 차비와 얼마의 돈을 더 주고 갔다. 그 때 그녀는 우리에게 하늘에서 나타난 여신 그 자체였다. 주소와 이름과 사무실을 알아 두었다. 나이는 우리와 엇비슷한 듯 했고 당시 민락동에 위치한 동명목재에 다닌다고 했다.

이튿날 날이 밝아 부산역으로 가서 기차표를 샀다. 얼마간의 돈이 남았다.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것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둘은 다시 해운대로 갔다. 남은 돈으로 다시 한번 파친코에 도전해본 것이다.

한참 뒤 극동호텔 문을 열고 나오면서 둘은 서로를 보고 그랬다.

"야 이 미친 놈아! 파친코에 그 나머지까지 다 날리냐?"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둘은 또 마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그 아가씨가 전해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 사람 없단다. 다시 알려준 주소 대로 편지를 썼다.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어 왔다.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결국 돈은 돌려주지 못했다. 마치 홀린듯한 기분이었다. 이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하면 아무도 믿지않고 거짓말한다고 미친놈 소리 듣는다. 결국 먼저 저승으로 가버린 친구와 나만이 아는 진실이 되고 말았다.  이제 그 마저 없으니 이 이야기를 할 경우 내가 지어낸 쌩구라라고 웃음거리 되기 십상이다.

그 친구와 고등학교 시절 연하장을 그리던 생각이 나서 몇 해 전 다시 한번 그려봤다. 그 때 그린 그림보다는 훨씬 못 그렸지만 그래도 그 친구와의 추억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부산 극동호텔의 파친코 문을 열고 나오면서 맹세했다.

 '앞으로 놀음 같은 것은 평생 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기나 놀음은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복권 한 장도 사본 적이 없다.


돌아오지 않는 친구를 위해 하이쿠 한 수를 읊어본다.


山和江 /  金善皓


比开心的山

悲伤的江水越深

越长久流淌



산과 강 / 김선호


기쁜 산보다

슬픈 강이 더 깊고

오래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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