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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호 Aug 20. 2018

불새의 혀를 가진 진공관

토륨 텅스텐 필라멘트 RCA 801A


      

옛말에 구경거리 중에 으뜸은 불구경과 물난리라고 했다. 사실 이것은 좀 잔인한 구경이기는 하다.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가는데 그것을 구경거리라고 하고, 또 불이 나서 전 재산이 화마에 휩싸여 있는데 그것을 구경거리라고 하니 말이다. 

사실 지금도 어디서 사이렌 소리만 나면 걱정과 함께 어디서 불이 난 걸까 궁금해한다. 하지만 요즘은 굳이 욕먹어가면서 불구경할 필요는 없다. 불록버스터 영화를 보면 대부분 대형 화재가 나니 말이다. 게다가 화재를 주제로 만든 영화도 많이 나온다. 이런 영화 류를 이른바 재난 영화라고 한다.      


진공관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면서 불구경하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다. 

 “촛불이 자색 단령 자락의 바람에 펄럭이며 꺼질 듯하더니, 검은 연기 한 가닥만 그을음으로 오르다가 다시 고르게 자리를 잡는다.

  그을음의 그림자.

  강모는 촛불을 내려다본다.

  밀초의 투명한 미색 불꽃은 언저리에 푸른 서슬을 품으며 작은 새 혓바닥처럼 날렵하게 빛을 내밀고 있다 “     

고 최명희 씨의 장편소설 ‘혼불’ 가운데 강모가 촛불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대목이다. 사람은 불을 보고 있으면 아무튼 묘한 생각이 드는가 보다. 그것이 불을 훔쳐온 원죄의식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작은 불을 보고 있으면 더욱 그런 것을 느끼는 모양이다. 음악을 들으며 들여다보고 있는 진공관도 이렇게 촛불 같은 느낌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RCA에서 군사용으로 제작한 송신용 진공관 801A는 딱 그런 느낌이다. 족보를 따져보면, 1차 세계대전 이후 1921년 경 UV202, UV203, UV204와 같은 아마추어 송신용 진공관이 개발되었는데, 이것은 대부분 UV201에서 개량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24년 UV210이라는 진공관을 개발하기 이르렀고 바로 이어서 UX210이라는 진공관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UX210은 10 또는 10Y라는 저주파 진공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저주파 진공관은 일반 송신용 진공관과는 약간 다르다. 즉 오디오 주파수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고전압을 걸지 못하고 출력도 비교적 낮았을 뿐 아니라 수명도 짧은 편이다. 모양은 발룬 타입(가지형)이었다. 동일한 계보로 마지막 발전된 것이 801A이다. 801A는 300B와 같은 ST타입이며, 고전압을 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뿐만 아니라 UX210이나 10Y 등에 비해 전류도 2배나 흘릴 수 있어서 출력도 월등히 많이 나온다.      

필라멘트는 토륨 텅스텐을 사용했기 때문에 백열전구처럼 불이 벌겋게 들어온다, 그래서 진공관을 동작시키면 진공관 내부의 운모판 사이로 타오르는 불새의 혓바닥을 내민다. 이렇게 환상적인 불새의 혓바닥을 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사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1806년 영국인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가 전기 실험을 하던 중 전자의 양극에 연결된 전선 끝에 목탄 부스러기를 마주 대면 불꽃이 튀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탄소 아크등을 발명하였는데, 이것은 1808년 파리의 콩코드 광장의 가로등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탄소는 금방 연소되기 때문에 자주 전극을 갈아주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54년 하인리히 괴벨에 의해 백열등이 개발되었지만 이 역시 수명은 매우 짧았다. 결국 1879년 에디슨에 의해 전등이 발명되었는데, 밝기는 촛불의 약 16배에 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텅스텐을 이용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에디슨의 전구도 수명이 긴 편은 아니었다.      


20세기 초 마침내 텅스텐 필라멘트가 등장한다. 1906년 오스람(Osram)사의 연구진은 섭씨 2,000도에서도 녹거나 타지 않는 텅스텐을 찾아내어 이것으로 필라멘트를 만들게 된다. 이것은 불새의 혓바닥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것으로, 일거에 전 세계를 평정해 버렸다. 바로 이 텅스텐에 토륨을 섞어 진공관 필라멘트로 이용한 것이다. 초기에는 그냥 텅스텐만으로 필라멘트를 만들었지만, 이후 전화 증폭 유선통신용 진공관에는 탄소화합물을 필라멘트에 도포했다. 때문에 불새의 혀가 날름거리지 않았다. 그저 동작하고 있는 진공관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겨우 필라멘트가 발갛게 가열된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직열 진공관은 대부분이 그렇다.      

무선 통신용 송신관은 탄소화합물로 도포하지 않고 토륨을 섞어서 필라멘트로 사용했다. 송신용 진공관 필라멘트에 옥사이드 코팅을 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송신 신호가 옥사이드 코팅 부분을 거치지 않음으로써 신호의 직진성을 강화하고 번짐을 적게 하기 위한 때문으로 추측된다.      


통신용 진공관은 20세기 이전만 해도 장거리 통신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직진성을 갖는 무선 통신 신호는 일정한 직진 거리를 벗어나면 도달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1874-1937)의 무선 통신은 도버해협이나 대서양을 건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912년 빙산과 부딪힌 타이타닉호의 무선 송신은 700여 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1924년 영국의 물리학자 애플턴(Edward V. Appleton, 1892-1965)에 의해서 밝혀졌다. 즉, 지구의 대기층에 전파를 반사시키는 전리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애플턴은 이 발견으로 194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서너 해 전에 801A를 이용해서 싱글 파워앰프를 만들었다. 채널당 2개씩 패러럴로 동작시켰다. 플레이트 전압은 약 600 볼트, 출력은 약 8와트 정도. 송신관은 청명하고 화사한 음색이 일품이다. 벚꽃 휘날리는 봄날의 양지 끝에 머무는 음색이라고 할까. 거기 불새의 혓바닥이 오묘하게 날름거린다. 패러럴 싱글이기 때문에 저역이 모자람이 없다. 이 앰프는 불새의 빛을 발하면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Fire Bird)’를 방안 가득 울리고 있다.  

    

RCA 801A * 4  U.S.A.

RCA 5693 * 2  U.S.A.

Partridge Output Transformers  England

4, 16 Ohm

8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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