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의 도전
캐리비안의 해적 (Pirates of the Caribbean)
"블랙 펄의 저주"
* 영화 OST
감흥을 주지 못하는 난해한 음악은 지나가는 개도 안 물어간다. 마찬가지로 재미없고 너무 어려운 영화는 날아다니는 새도 안 찍어 먹는다. 하지만 예술성은 좀 덜 할지라도 재미있는 판타지 영화나 모험담 영화는 나름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판타지 영화이자 킬링 타임용 블록버스터 영화는 때로 유치하고, 보고 나면 남는 게 없고, 또 뻔한 스토리라는 편견이 있다. 특히 영화 평론가들이나 예술 영화 예찬론자들에게는 어쩌면 유치 찬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는 좀 다르지 않나 싶다. 선과 악의 구분도 묘하고, 또 원작 소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베낀 만화 원작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재미있다. 게다가 모험담에 판타지까지 지닌 월트 디즈니의 이 영화를 필자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영화 OST(Original Sound Track)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참 놀라웠다. 이 영화는 시리즈로 현재까지 다섯 편이 개봉되었고 별도 CD로 발매한 OST는 세 종류이다. 그 가운데 단연 '블랙 펄의 저주' OST가 압권이다.
* '블랙 펄의 저주'
음반의 첫 곡은 'Fog Bound'로 안개에 싸였거나 발이 묶였거나 아무튼 그런 의미이다. 마치 민속 음악처럼 경쾌하고 즐거운 느낌으로 시작된다. 영화 자체가 판타지 영화 부류에 속하니만큼 영화는 처음부터 음산하고 무겁게 시작할지라도 음악은 경쾌하고 밝은 표정으로 뒤따른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조용하게 시작할 때는 마치 그리그의 '페르귄트 조곡'의 서정적인 부분을 듣는 듯하다.
그러다가 이내 다이내믹한 영역으로 들어간다. 해적이나 무슨 괴물쯤 나타난 모양이다. 함포를 쏘고 칼과 총을 들고 설치는 장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때는 엄청난 음량으로 총주가 몰아친다. 마치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듣는 것 같다. 또 들판에서 대편성 오케스트라 연주 때 대포를 북 대신 사용한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에 못지않다. 괄호열고 이 말에 "어찌 그깟 영화 OST를 1812년 서곡에 비교하느냐"라고 화낼 분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데 어쩌랴 괄호닫고
때로는 익숙한 멜로디, 때로는 음산한 분위기, 뿐만 아니라 톡톡 튀는 경쾌하고 즐거운 멜로디, 그리고 장중하고 스케일이 있는 멜로디가 한참 동안 잔치를 벌인다. 이런 여러 가지 다양성과 깊이 있는 음악성 때문에 필자 생각으로는 단순히 영화 OST로 치부하고 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곡이라고 생각한다. 온갖 악기가 모두 나와 각각의 독자적인 악기의 음색과 멜로디를 가지고 다양성과 실험성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난해한 초현실주의 음악의 이해할 수 없는 곡을 들을 때보다도 오히려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있다.
* 새로운 장르의 클래식
사실 음악이 어떤 격식에 갇혀서 대중과 멀어지고, 또 필자가 늘 이야기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빠져 극소수의 전유물이 된다면 그것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슬픈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캐리비안의 해적'은 친근하고 익숙하고 재미있어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장르의 클래식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본다.
필자의 견해로는, 곡이 그렇게 다양해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시나리오를 보고 장면을 연상하면서 작곡을 했기 때문인 듯하다. 정말 놀랄 정도로 다채로운 멜로디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리고 영화의 장면을 떠오르게 하거나 여러 가지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물론 전통적인 클래식처럼 형식을 갖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식을 깨버릴 때 오히려 더 나은 음악이 태어나기도 한다. 캐리비안의 해적은 바로 그런 음악의 하나로 평가하고 싶다.
'블랙펄의 저주'를 작곡한 클라우스 바델트 (Klaus Badelt)는 본래 독일에서 영화음악을 하던 사람이다. 1967년생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독일에서도 영화음악에 종사했는데, 1998년 오스카를 수상한 한스 짐머(Hans Zimmer)의 초청으로 할리우드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글래디에이터', '이집트 왕자'와 같은 작품 OST를 공동 제작하기도 했다. 이후 독자적인 OST 작품으로는 '포세이돈', '콘스탄틴', '타임머신' 등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단연 '캐리비안의 해적 ㅡ블랙 펄의 저주'라고 할 수 있다. 이 재미있고 신나는 신종 클래식을 다시 한번 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세계음악 컬럼니스트 김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