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삼각뿔

아내라는 이름의 삼각대

by 강소록

밤 11시 20분.


아직은 오늘이다. 10시부터 시작된 킬링타임용 TV영화를 보면서 남편을 기다렸다.

TV를 끄고 이제는 전화가 올 텐데 하는 순간, 요란한 소리로 전화기가 울렸다. 음량을 너무 키웠나.


" 둥녀야. 학교 앞으로 데리러 나와. 추워 죽겠어."

" 기다려. 조금만 걸어서 학교 앞에서 만나."


항상 학교 앞 담벼락이 주차 지정석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학교장이 담벼락에 주차를 금지시키는 바람에, 남편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길가에도 주차하고, 삼계탕집에도 주차를 했다.


그녀는 주섬 주섬 보이는 대로 옷을 걸쳐 입고, 학교 앞으로 향했다.

남편이 도로 쪽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비틀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남편이 항상 주차하던 자리였던 학교 담벼락 아래에는, 주황색 삼각뿔이 이제 여기는 내 자리야 하며 선언하는 듯이, 기세등등하게 딱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꼴 보기가 싫었을까 아님 그냥 화딱지가 났을까, 남편이 한 때 축구 좀 했던 실력을 뽐내며, 발로 삼각뿔을 뻥~ 차 버린 것이다!

아니 그랬더니 포물선을 그리며, 담을 휙 넘어 학교 운동장에 뚝하고 떨어졌다.


"아니, 여보! 미쳤어!!"

"뭐, 내가 뭐! 으으윽 우웩!"


남편이 남산만 한 배로 땅에다 헛구역질을 하는 게 영락없이 남자 임신부가 입덧하는 모습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부러진 삼각뿔을 갖고 싸울듯한 기세로, 학교 쪽에서 걸어오는 것이었다.


"이보쇼, 당신 맞지? 이걸 걷어찬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마구잡이로 부술 수가 있어?"


할아버지가 화가 난 듯이 남편에게 고함을 질렀다.


"뭐라고? 이 씨... "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멀쑥한 할아버지가, 술 취한 남편 눈에는 자기 또래로밖에 안 보였나 보다.

남편은 꼬부라진 혀로 아무 말 대잔치에, 동물의 왕국을 즐겨봤던 실력으로 으르렁거리며, 앞발을 들고 달려들었다. 할아버지는 멱살을 잡힌 채 흠칫 놀라는 듯하다가, 이에 질세라 남편의 어깻죽지며 가슴팍을 사정없이 공격했고, 옷을 하도 잡아당겨 양복이 내복이 될 뻔했다.

한데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 사태가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그녀가 중간에서 싸움을 뜯어말리느라, 입고 갔던 고무줄바지가 흘러내린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다리가 썰렁해서 보니, 어느새 바지가 반쯤 내려와 있는 게 아닌가! 완전히 그녀에게 있어 인생 흑역사의 날이었다.

싸움이 조금 진정되고 할아버지가 도저히 말이 안 통하고 답답한지, 갑자기 모자를 훽 벗었다.


"내가 이래 봬도 나이 칠순하고도 일곱이야. 낼모레가 팔순이라고, 알아?"


그녀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나이가 많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육십 대 후반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요즘엔 할아버지들도 관리하시나 보다.

님편보다 정신줄 잡고 있는 그녀가, 남편대신에 파리처럼 두 손 두 발 싹싹 비비듯 할아버지께 사과를 하고 나서야, 사건은 마무리가 되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속이 쓰리다며 해장할 거 뭐 없느냐는 남편에게, 그녀는 괘씸죄를 적용해 카레를 진하게 만들어 줬다. 카레밥인지 눈칫밥인지 김치랑 대충 뱃속에 쑤셔 넣은 남편이 어제 일에 관해 물었다.


"둥녀, 나 어제 어떤 할아버지랑 싸운 것 같은데, 대체 왜 싸웠지?"

"아니, 가장 중요한 게 기억이 안 나? 실화야?"

"근데 그 할아버지 완전 대머리였던 거 같은데, 문어같이."


할아버지 머리를 쥐어뜯은 기억이 없어서일까. 그것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내로부터 어젯밤 이야기를 듣더니, 할아버지를 찾아가 사과해야겠다고 했다. 하도 성화를 부려서 부동산이랑 편의점, 경로당까지 가서 수소문해 찾아볼까도 생각했지만, 가능성이 1도 없다고 느껴서 그만두기로 했다.


아내는 남편이 늘 편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런 아내가 너무 고맙고 좋았다.


부러진 삼각뿔처럼, 남편은 또 넘어졌다. 그녀가 있어 그래도 다행이다. 아내라는 삼각대가 있어 남편을 세워줘야지..


가정이란 아내와 남편, 아이가 삼각대처럼 서로 지지하고 받쳐주는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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