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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onymoushilarious Feb 13. 2020

말할 수 없어서 영원한 사랑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1」어떤 사람 또는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2」어떤 사물 및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3」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4」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
「5」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마음. 또는 그런 일.
「6」 열렬히 좋아하는 대상.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하는 "사랑"의 의미이다. 영화 속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은 이런 6개의 정의를 모두 충족한다. 단 한 가지, 남녀 간이라는 전제를 제외한다면.

 표면적으로 영화를 바라보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결혼시키기 위해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야 한다는 미션이 있었기 때문에 순수한 관심에서 엘로이즈를 바라본 것은 아니다.  때문에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행복을 빌었던 것은 빈껍데기와도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처음부터 그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서로를 보는 눈빛이 모든 의문을 해소한다.

영화를 보다보면 인상적인 메타포와 몇 가지 사회적인 토론을 유발하는 요소가 등장한다.

1. 오르페우스 신화

익히 알려져 있는 오르페우스 신화는 지하의 신 하데스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오르페우스가 그의 하나뿐인 사랑을 지옥에서 데려오는 과정에서 그의 사랑을 다시 잃어버리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신화에 대해서 각자 새로운 시각의 해석을 내놓는다.


마리안느: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거지.

엘로이즈: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봐 라고 말했다면?


이 부분에서 두 인물이 신화 속 오르페우스에 감정이입을 했는지, 에우리디케에 감정이입을 했는지 보여주며 신화 속 인물이 두 인물의 역할이 합치된다. 영화 속에서 마리안느는 시인, 예술가의 입장을 대변했고,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 입장의 차이는 영화 후반에 중요한 장면으로 표현된다.

2. 수영에 도전하는 엘로이즈

엘로이즈는 자신의 옥죄는 결혼이라는 억압에 순응하지만 마음 속에는 분출되지 못한 분노를 가진 여인이다. 그 분노와 자유에 대한 갈망은 두 사람의 첫만남에서 엘로이즈가 절벽을 향해 냅다 뛰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인생의 선택권을 가진 마리안느가 자신의 캔버스가 물에 젖자, 수영을 하면서 바다에 떠다니는 캔버스를 회수하는 모습은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제한적인 삶을 사는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의 당찬 면모는 충분히 끌릴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주체성을 닮기 위해 수영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듯했다.

3. 각자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편협함

하지만 그런 마리안느조차도 화가로서 사회가 제약한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화가였다. 초상화가 지켜야 할 형식이라고 사회가 정해놓은 제약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엘로이즈가 미술에 대해 더 자유로운 관점을 가지고 마리안느의 그림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 비판은 극 초반에 등장하는 타오른 여인의 초상이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와의 사랑으로 관습의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처럼 이 두 캐릭터의 상충된 면모들은 그들의 사랑을 더욱 빛나게 했고, 그들의 한계를 서로가 보완하며 하나의 완벽한 합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이 둘만이 알 수 있는 작품은 그들이 헤어져도 그들의 공통분모가 되어 그들의 사랑은 세상에 알릴 수는 없어도 그들만 알 수 있는 암호같은 사랑이 되었다. 그 암호는 28페이지 그리고 피아노이고,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그들의 사랑의 영원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다.



총평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많이 가져다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부족을 채워줄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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